『매일신보』가 그려낸 1919년 감옥의 풍경
The Image of Prison in the year 1919, depicted by 'the Mae-il Shin 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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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논문은 1919년 『매일신보』에 이례적으로 나타났던 감옥묘사를 분석한 글이다. 일반적으로 감옥은 외부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성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1919년 식민지 통치당국은 『매일신보』 지면을 통해 감옥 내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글은 그 배경과 의도를 추적한 것이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통치의 안정을 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력한 무력진압으로 3·1운동을 잠재우고자 했고, 그런 폭력성은 1919년 감옥 내부에도 관철되고 있었다. 하지만 폭력적 지배는 자신들의 통치가 ‘문명·근대’적이기보다는 ‘야만·전근대’적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감옥 내부 처우에 대한 소문과 외국인 선교사들의 조사 및 문제제기가 등장하자, 식민통치당국은 자신들의 폭력적 행위를 감추고 자신들의 근대적이고 문명적인 통치를 감옥묘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이때 『매일신보』가 보여준 감옥의 모습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말하는 화자와 대상은 식민 통치 당국에 의해 선택되었다. 화자는 감옥 간수 혹은 몇몇 외국인 선교사로 제한되었고 대상은 식민지 경성의 서대문 감옥뿐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감옥은 ‘근대적’이고 ‘문명화’된 공간으로 설명되었고, 간수들은 ‘친절’하고 재감자는 ‘얌전’하게 묘사되었다. 이를 통해 식민 통치 안정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할 의도를 식민지 통치당국은 관철하고자 했다. 『매일신보』의 감옥묘사는 1920년 4월 이은 왕세자 결혼과 은사령 시행 때까지 이어졌다. 간수로 대표되는 식민지 통치자의 선정과 관용이 부각되었고, 독립을 꿈꾸었던 재감자들은 자신의 지난 1년을 반성·후회하는 모습으로 이야기되었다. 독립을 꿈꾸었다는 사실은 ‘罪’로써 표상되었다. 3·1운동 가담자들에게 ‘日鮮融和’를 상징했던 이은왕세자 결혼을 통해 그 ‘죄’를 용서받는 역할을 부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1919년의 감옥을 드러내는 것을 통한 통치 정당화·안정화는 성공할 수 없는 기획이었다. 통치당국은 자신들의 불안함을 숨길 수 없었고, 감옥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가혹한 폭력, 전근대적인 상황들을 가릴 수도 없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를 비롯한 식민지 조선인들에 의한 언론 공간이 창출되면서, 『매일신보』가 하는 이야기는 조선인들에게 영향력을 독보적으로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감옥은 다시 높은 담벼락 너머의 ‘비가시적 공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Abstract
This article is aimed at analysing the background and the meaning of prison depiction. Generally speaking, the prison is the space of invisibility from outside. But, using Mae-il Shin Bo, Japanese colonial rulers depicted the prison scene in the year 1919. After the March First movement, Japanese colonial rulers launched for political stability. At this time, they used violence to Koreans for the suppression of the March First movement. This violence showed that their rule was uncivilized and premodern rather than civilized and modern. Using prison depiction, rulers wanted to cover up this violence, and show their civilized and modern ized rule. At this time, the prison showed by Mae-il Shin Bo was limited. Speakers and subjects were selected by colonial rulers. Speakers were limited to prison officers and a few foreign missionaries, and subject was only the Seodaemun Prison in Seoul. Using Mae-il Shin Bo, rulers depicted the prison as the civilized and modern space, prison officers were kind, and inmates were well-behaved. The prison depiction using the Mae-il Shin Bo was over by April, 1920. There has the marriage of Lee-Eun(李垠) and Nashimotomiya-Masako(梨本宮方子), and the free pardon. The participants in the March First movement were invested with the role, being forgiven by Japanese colonial rulers. But Koreans didn't turn over to rulers' in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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