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晉州에서 실시된 洞約의 분석
Analysis of Dongyak (洞約) executed in Jinju (晉州) in the Late Yi-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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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진주 내에서는 역대 수령들이 주도하여 고을 전체에 鄕約을 실시하는 경우 이외에, 士族들이 마을별로 독자적으로 洞約을 실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현재까지 발견된 사례만 해도 13건이나 된다. 동약의 실시시기는 다양하였다. 동약이 실시된 面里는 대부분 사족들의 기반이 안정된 곳이었지만, 동약을 주도하는 가문이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임진왜란 무렵에는 여러 성씨가 참여하되, 특정 성씨의 내·외손이 같이 주도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유교적 규범이 확산되고 친족제도가 변하면서, 각 마을에서 유력한 특정 성씨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런데 동약에는 사족층만 참여하지 않고, 비사족층들이 참여하는 사례도 많았다. 이 경우 내부 조직을 上洞·下洞으로 구분하고, 사족과 비사족층을 신분적으로 엄격하게 차별하는 규정을 두고 있었다. 이런 차별은 이후 사회변화에 따라 약화되는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차별이 유지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사족층만 동약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진주의 동약마다 동규 내용도 다양하다. 退溪의 향약이 영향을 미치던 진주에서도 그것이 각 동약에 모두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진주에서의 동약은 書室 운영과 구성원 자제의 교육에 관심을 쏟는 점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Abstract
There were quite a few cases of the native tribes (士族) using dongyak (洞約). In addition hyangyak (鄕約) was used in the whole district under the leadership of the chief of that time in Jinju. 13 cases have been discovered. The enforcement time of dongyak varied. Myeonri (面里), which used dongyak, was a mostly stable basis for native tribes. However, the family which took the leadership of dongyak chang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various families participated. There were, however, instances in which certain descendants of some families lead together. However, after the 17th century, while Confucian norms were proliferated and the family system changed, influential families occupied dominant positions in each village. However, there were many cases in which non-native tribes (in addition to native tribes) participated in dongyak. In these cases, the inner organization was divided into sangdong (上洞) and hadong (下洞). Native tribes and non-native tribes were strictly differentiated in respect of their positions. This differentiation weakened along with social change but there there were many cases in which the differentiation was maintained. Sometimes only native tribes participated in dongyak. There were various regulations of dongyak according to dongyak of Jinju. Every dongyak was not completely accepted in Jinju, which was influenced by Toegye (退溪)'s hyangyak. Dongyak in Jinju was remarkable as it paid attention to the operation of study rooms (書室) and the education of the children of the me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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