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학/지식 장에서 ‘만보산 사건’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
Several Ways to Commemorate Wanpaoshan Incident in the Literary and Knowldge Field in Korea(1931~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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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만보산 사건’이 한국의 지식 장과 문학 장에서 기억되는 방식들을 살펴보았다. ‘만보산 사건’은 그 상징적 의미가 중대하고 복잡한 당대 상황을 적실하게 투영하고 있음에도 1980년대 박영석의 「만보산 사건 연구」가 간행되기 전까지 본격적인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글은 사건이 발발한 1931년부터 객관적 논의의 대상이 된 1987년 이전까지 발표된 문건들을 참조하여 ‘만보산 사건’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기억되어온 양상과 그 배경을 살펴보았다. ‘만보산 사건’은 시대적 담론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그 의미가 새롭게 규정되었고, 다른 양상으로 그 기억이 공유되었다. ‘만보산 사건’은 그 기호의 외연이 다양하고, 그 사건을 구성하는 여러 갈등 주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갈등은 흔히 여러 갈등 주체의 층위를 단순화한 이분법적 갈등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런 형상화와 의미 규정은 관련 텍스트가 처한 시간적/공간적 담론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태준의 「농군」(내선일체와 식민주의적 팽창주의)이나 안수길의 「벼」(오족협화), 그리고 박계주의 「대지의 성좌」(독립 과정의 능동성 강화)는 각 텍스트들이 생산된 담론 환경의 지배이데올로기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만보산 사건’을 중국 대 조선인의 갈등으로 설정할지, 혹은 중국․조선 대 일본의 갈등으로 설정할지는 이러한 맥락의 자장 하에 놓여진 문제였다. ‘배화 사건’은 조선 사상 초유의 이민족 대상 증오 공격으로, 이 사건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가 극히 적다는 것 자체가 이 사건이 조선인에게 윤리적 트라우마로 작용했다는 방증이 된다. ‘만보산 사건’을 일본의 획책으로 의미규정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조선인의 책임 의식은 희석되었다. 그러나 당대 조선에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던 배화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는 기억은 완전히 억압되지 못했는데, 그 기억은 중국인을 국제 정치의 공동체로 소환하지 않고 경제적 경쟁자로 소환했을 때 편린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Abstract
This paper studied several ways of the commemorations of Wanpaoshan incident in the literary/knowledge field in Korea from 1931 to 1987. The interpretations and commemorations of the incident had been influenced by the political discourses and environments of each periods. As a result, the memory of the incident has been often simplified into dichotomy(Chosun/Japan vs Chiana, or Chaina/Chosun vs Japan) due to political needs and senses. Short stories such as Nong-gun(Lee, Tae-joon), Rice(Ahn, Soo-kil), Constellation of the earth(Park, Kye-joo) set the dichotomy in their narrative differently because of the various ideologies and discourses. Anti-Chinese riot in 1931 is one of the unprecedented ethnic-conflict in Korean history. As the newspapers in the period claimed that the conflict was the result of the plan of Japanese government, Korean people was able to suppress the sense of guilty for years. However, the memory of the anti-Chinese consciousness of the period had been revealed for several times in the articles that recall the riot on the newspa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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