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 한국 고대의 계세사상과 그 실현 양상 -《일본서기》수인기(垂仁紀) 순장 기사를 단초(端初)로 하여-
韓国古代における継世思想とその実現の様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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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순장은 繼世사상이라는 내세적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사람의 犧牲`` 이라는 방식으로 행해진 祭儀의 일종이다.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 의해 신라, 가야 지역에서는 순장묘가 많이 확인되었다. 순장자의 수는 많을 경우 100명을 넘었으며, 고고발굴 자료에서도 수십명의 순장자가 확인되고 있다. 순장자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었고, 신분적으로 노비도 있고, 近臣도 포함되었다. 순장은 國都뿐만 아니라 지바에서도 행해졌다. 순장은 국가발전단계와 연관시켜 볼 때 집권력이 강화되고 사회분화가 진전된 部體制 단계에 와서 행해졌다. 부체제는 고구려의 경우 태조왕대에, 백제는 고이왕대에, 신라는 나물왕대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삼국의 순장제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순장이 폐지된 시기는 고구려의 경우 4세기 전반경에, 신라, 가야의 경우 5세기말 내지 6세기 초이다. 그러나 이순장제는 중앙 및 지방 귀족들의 人的 基盤을 해체하기 위한 왕의 의도,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노동력 가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 유학사상의 수용에 따른 인간 생명에 대해 새로운 인식의 대두 등에 의해 폐지되었다. 순장폐지 이후 계세사상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주인공의 생시의 생활 모습과 시중을 받는 모습 등을 담은 생활풍속도를 그렸다. 신라의 경우 土俑을 埋納하거나 積石木槨墓 石槨오관묘를 배장하기도 하였다. 왜의 경우 人形, 馬形, 家形 등 다양한 형상 식륜을 순장대용물로 매납하였다.
Abstract
殉葬は、継世思想という来世観を背景にして、'人間の犠牲'とする方式で行われた祭儀の一つである。考古学発掘調査によって新羅`加耶地域での少なくない数の殉葬墓が確認されている。殉葬者の数は多い場合は百人を越え、男女区別もしていない。身分は奴婢があれば、近臣も含まれていた。殉葬は国都だけでなく、地方でも行われていた。殉葬は国家発展段階と関連して見ると、権力の集中が強くなり、社会の分化が進んでいた'部体制'段階で行われていた。部体制は、高句麗の場合は太祖王の時代、百済では古爾王の時代、新羅は奈勿王の時代に行われた。したがって、三国の殉葬制もこの時から始まったと見ることができる。殉葬が廃止された時期は、高句麗や百済の場合4世紀に、新羅、加耶の場合は五世紀末乃至六世紀初である。殉葬廃止の背景としては、中央及び地方の貴族たちの人的基盤を解体するための意図、農業生産力の発展による労働力価値に対する認識の変化、儒学思想の受容のよる人間の命に対する新しい認識などが挙げられる。殉葬の廃止以後には、継世思想は様々な表現で現れた。高句麗の場合、主人公の生前の時の生活様子と、家来から世話を受けている様子などを含む生活風俗図を描いている。新羅の場合 土俑を埋納したり積石木槨墓に副槨式で石槨甕棺墓を倍葬したりしている。倭の場合、人形、馬形、家形など、様々な形の埴輪を殉葬の対納品として埋納し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