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淸使行의 永安橋 인식
Yongan Bridge recognition of Envoys to the Qi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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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청 태종이 永安橋를 세운 것은 군사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산해관을 돌파하기 위해 낸 군대를 출발지인 심양에서부터 진흙탕에 빠뜨릴 수 없었다. 심양에서 고가자에 이르기까지의 진흙탕에 흙을 쌓아 길을 만들었고[築路], 그 초입에 돌로 다리를 만들어 길의 시작을 알렸던 것이다. 청 태종은 그 길을 따라 지속적으로 西征했지만 끝내 山海關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의 아들 順治帝에 이르러 산해관을 넘어 北京을 정복했고, 마침내 수도를 옮기면서 중국 대륙을 석권했다. 이제 심양에서 北京으로 황제를 뵈러 가야했던 조선 사신들에게 ‘永安橋’라는 다리는 ‘영원히 편안하게 진흙탕길을 건널 수 있으리라’는 평범한 의미가 아니라 ‘중국을 영원히 평안하게 하리라’는 오랑캐 황제의 커다란 욕망과 포부로 인식되었다. 17세기 후반 연행사들은 ‘영안’이란 이름에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며, ‘오랑캐의 운세가 백년을 넘을 수 없다’며 청나라의 국운이 기울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강희-옹정-건륭의 治世를 이룬 청나라의 발전기 18세기 연행사들은 그들의 국가 운영 시스템과 경제 발전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다. 심양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수레를 활용해 편안하게 왕래하면서 목격한 변경[지방]-북경[중앙] 사이의 활발한 교류와 엄청난 물산의 이동에 압도된 연행사들은 영안교의 효용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한편 강희와 건륭이 심양의 선대 황제릉에 순행[東巡]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어느새 심양은 북경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 아니라 북경에서 오는 길의 종착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황제의 순행에 맞추어 한때 매몰되었던 축로가 다시 만들어지면서 영안교는 청나라 황실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떠나는 길고 힘든 길의 종착점이 되었다. 영안교는 어느덧 조상을 섬기기 위한 길의 가장 험악한 곳에 놓여져, 더 이상 걱정 없이 다닐 수 있게 만든 다리가 되었다. 황제들이 조상을 섬기는 아름다운 뜻을 함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안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전쟁 후 적대적으로 시작한 대청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마침내는 명나라 때와 다름없는 책봉조공체계로 안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Abstract
Hong Taiji[淸 太宗] was made a Yongan Bridge, it was due to military necessity. An army that was issued in order to break through the Shanhaiguan was not essential to the mud from Shenyang of departure. It was way loaded with dirt to mud up to go high in Shenyang [Tsuki-ro], he informed the start of the road to make a bridge of stone to the entrance. Blue Taejong, which was continually NishiTadashi along the way, can not be topped end Sankai Jour. Ultimately beyond the Shanhaiguan is led to his son Junji Emperor conquered Beijing, when it was finally moved to the capital, was swept the Chinese mainland. Bridge of "Yongan Bridge" in Korean envoys who you were going to see the emperor now Beijing in Shenyang "to be able to cross the forever comfortable mud road" is not a trivial sense, "China is forever and "Let alone in peace to, it is recognized as a great desire and aspirations of barbarian emperor. The late 17th century the annual event is to raise the issue seriously named "Yongan", wished that tilted "it is not possible to barbarians of fortune is more than hundred years," said Qing Kokuun. However, Yasushi - Yongzheng - generator 18th century swallow exercise of Qing who achieved the reign of Qianlong was only their national management system and hardness to economic development. Leveraging the wagon from Shenyang up to Beijing, witnessed while comfortable back and forth change [local] - Beijing lively exchanges and swallow exercise that has been overwhelmed by the movement of huge Bussan between the [central] is, Yong'an Bridge I began talking about utility. On the other hand, is repeated that the cruise [Higashimegu] Sendai fan gel tion of Kangxi and Qianlong is Shenyang, imperceptibly Shenyang is not at the beginning of the road to Beijing, began to be recognized as a return of end location in Beijing. Especially created temporary buried been Chukuro to match the cruise of emperor re, spiritual eyes school Qing imperial family became the end point of a long tough road to leave in order to honor the ancestors. Yongan Bridge unawares by being placed at the most insidious of the road for serve to ancestors, became the legs to carry around without further worry. Emperor and is adapted to imply the beautiful meaning to serve ancestors. Such a change in recognition of Yongan Bridge, and hostile Hall of relationship that began after the war entered a stable period, and finally, symbolizes the process until seated in Sakufu tribute system that does not change a bright during manner I want to have shows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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