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ERD
논문KCI 등재

嘉靖年間 ‘大禮議’에 대한 재고찰

Re-Consideration of ‘The Great Ritual Controversy’ in Jiajing Period

0

조회

0

다운로드

5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正ㆍ嘉 교체기의 양정화 내각과 정덕제 遺詔 내용, 그리고 가정제 즉위년-가정7년까지의 대례의 전개과정에 대한 검토를 통해, 종전의 연구에서 드러나고 있는 문제점과 중요 사안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양정화가 초안한 정덕제 遺詔의 ‘兄終弟及’을 ‘考孝宗’으로 해석하는 것은 수용하기 어려운 논리적 결함을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考孝宗’說이 주자학적 명분론에 근거하여 繼統을 繼嗣와 동일시하거나 우선시함으로써, 현실적으로는 가정제의 경우처럼 生父의 繼嗣와 主祀 문제를 야기하는 등 개인적으로는 天倫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더구나 人情에 기반한 孝를 중시하는 양명학이 풍미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가정제와 이를 지지하는 의례파의 논리적 비판을 초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히 예상될 수 있는 귀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가정제가 이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한 즉위년부터 가정3년까지의 대례의 논쟁은 ‘考孝宗’의 명분론적 정통론에 대한 의례파의 논리적 문제 제기인 동시에, 유교적 예교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례의가 시작된 처음부터 이를 단순히 황제권과 내각권의 길항관계로 설정하거나, 특히 양정화 내각을 황제권력을 견제하는 내각권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편화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내각권을 강조하는 양정화를 비롯한 구신 세력들의 성격 평가와 관련하여, 특히 ‘군신공치’를 근거로 이들을 개혁적 성향으로 평가하는 동시에 이후 동림당과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견해 또한 역사를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평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실증적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 양정화 내각이 추구하고 있던 정치적 지향점은 정덕제 遺詔에 대한 검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홍치 치세의 복원에 있었고 가정제의 즉위를 계기로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반영할 수 있는 정덕 연간의 폐단 청산이나 혁신적 정책 제시 등 미래 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로의 복귀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일개 진사에 불과했던 張璁을 비롯하여 대례의 개정을 주도적으로 주장했던 의례파는 대부분이 하급 관료나 지방관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명분론보다는 현실적인 행정경험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풍미하고 있던 양명학의 영향을 직ㆍ간접적으로 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명분이나 이념보다는 실제를 중시하고 이를 실현하는 현실 정치의 혁신적인 정책과 제도화를 추진하는데 초점을 두고, 구신 세력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과 조직적인 공세를 통해 입지를 확장함으로써, 구신 세력에 대립되는 신진 세력으로 결집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가정제의 절대적 지원과 환관 세력의 도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로써 양정화 내각을 중심으로 하는 舊臣 세력은 대례의 논쟁에서 나타나듯이 주자학적 명분론에만 매몰된 나머지 이념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의례파들의 공격과 반박에 대응할 수 있는 논리나 현실적 정책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취약한 결집력을 드러내면서 대례의 논쟁과정에서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한편, 가정3-4년 시기에는 대례 논쟁을 이어서 제기된 흥헌왕 立廟 문제를 둘러싸고 구신 세력과 신진 세력 간의 논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즉 ‘考孝宗說’을 둘러싼 대례 논쟁이 가정제를 비롯한 신진 세력의 승리로 일단락됨에 따라, 이들에 의해 새롭게 제기된 興獻王 立廟 문제는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예제적 질서와 명 왕조 개창이래의 祖宗之制를 고수하려는 정치세력과, 가정제를 중심으로 君統을 새롭게 수립하여 황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세력 간의 갈등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특히 황권 강화에 저항하는 정치세력은 내각권의 복원과 이에 의한 군신공치의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여기는 대부분의 관료층과 공론정치를 대변하는 사대부를 망라하고 있었다. 따라서 황권과 내각권의 길항관계는 실제로 양정화 내각 시기가 아니라, 바로 이 시기에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가정3년 이후 흥헌왕 입묘를 제기한 가정제와 그를 옹호하는 신진 세력들은 흥헌왕(이후 睿宗으로 추존) → 가정제로 이어지는 독자적 帝系의 수립을 추진하는 동시에, 인적 물갈이를 통해 황제독재의 권력구조와 정치운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현직 관료와 과도관을 포함하는 사대부들의 정치적 이상과 이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저항과 반발은 관료와 언관, 그리고 공론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사대부들로 확대되었고, 현실적으로는 내각권의 황권 견제를 통한 ‘군신공치’를 이상으로 하는 유교적 이념과 소양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들의 반감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흥헌왕 입묘 문제는 결국 左順門 伏哭 사건을 초래하였지만, 이미 가정제를 중심으로 하는 君統의 수립을 통해 황제 중심의 체제를 구축한 상황에서, 이들의 반감과 저항 또한 가정제의 강경책에 의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明倫大典』의 편찬과정을 계기로 이들 정치세력은 법적 제제를 통해 청산됨으로써, 황제 중심의 정치체제가 정립됨은 물론이고 가정제를 비롯한 친위세력에 의한 정치가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전례의 개정을 시작으로 전개된 가정연간의 대례의는 典禮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흥헌왕 종묘 入廟를 거치면서, 가정제의 帝系를 중심으로 하는 君統 수립과 황제 중심의 체제 구축, 가정제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정국 주도 등 가정제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 세력의 재편으로 마감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수립된 황제 중심의 국가운영체제는 가정제의 안이함과 齋醮 탐닉 등 정사 소홀로 인해 오히려 황권의 사적화가 극대화됨으로써, 대례의 전개과정에서 논리적 기반을 제공했던 의례파를 비롯한 신진 세력의 이탈을 초래하였다. 이로써 이들이 지향했던 당초의 정치적 비전이나 혁신적 정책 추진을 지속하지 못한 채, 그 방향성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명분론적 의례질서에 대한 논리적 반격과 함께 그 결과 수립된 새로운 君統은 가정제 중심의 정치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함으로써, 신진 세력이 추구했던 혁신성은 중단되었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가정 연간의 대례의는 명분론적 의례질서와 각종 祖宗之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황제 중심의 정치체제 수립과 정책 중심의 새로운 국가운영 시스템의 시도라는 점에서 신진 세력들의 혁신성이 일정 정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이를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추진할 동력과 방향성을 상실함으로써, 신진 세력의 혁신성은 가정제의 독주와 怠政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이는 또한 명대 황제 중심의 정치체제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례의 논쟁 이후의 정치는 결국 신진 세력이 제시한 혁신적 정책을 계승할 것인지, 萬曆 연간 張居正의 개혁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아니면 전통적 의례질서로의 회귀를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추후의 정치 운영과 각 정치세력 간의 역학 관계 속에서 재검토되어야할 것이다.

Abstract

The expression ‘兄終弟及’ in the imperial edict of the late emperor written by Yan Tinghe is not logically possible to be translated as “succeeding Emperor Xiaojong 孝宗”, and this translation in reality resulted in the violation of the fundamental family relationship by neglecting the point of emperor's living father's succession in the case of Jiajing Emperor. The new officials ciritic against this translation was natural under the circumstances that the influence of Yangming school which especially emphasized filial piety on the basis of human empathy was increasing Therefore, The Great Ritual Controversy during the earliest three years after Jiajing emperor was enthroned was on one hand the new officials' logical presentation of problem against the orthodox rite declaring Jiajing emperor's succession of Xiaojong, and at the same time suggested a fundamental question on the Confucian ritual order. Therefore, the traditional perspective to understand the Great Ritual Controversy in the aspect of the political conflict between emperor's power and the grand secretariats' power or to generalize Yang Tinghe's faction as representing the right of grand secretary should be reconsidered. And perspectives estimating them innovative on the ground that they insisted on "the cooperative administration of the emperor and subjects" or emphasizing their connection with Donglindang also need much more positivistic analysis and research for them to be confirmed. Then the controversy between old officials and new officials entered into a new phase because of the problem of the emperor's father prince Xingxian's title and ancestral rite during the third and fourth year of Jiajing empeor. After the Great Ritual Controversy ended with the winning of the emperor and new officials against the old officials, the conflict between the political forces began to be exposed. One party adhered to the ritual order based on the ethics of Zhu xi school and the ancestral rites established at the time of dynastic foundation, while the other party intended to strengthen the authority of emperor by setting up a new royal lineage directly connected with Jiajing emperor himself. The former comprised most of officials and scholars who hoped the restoration of the grand secretary's authority and the realization of the ideal Confucian righteous government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the cooperative rule of emperor and subjects'. Consequently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emperor's power and subjects' power did not rise in the period of Yang Tinghe's government, but late in this period. The new political force advocating Jiajing emperor's opinion on his father prince Xingxian's title and ancestral rite baldly pursued the construction of the autocratic power structure for emperor and implemented the politics for it through the large scale of exchange in the government personnel, which caused the resistance and the opposition of many officials and scholars. However, emperor and his faction pressed down the opposite force and opinions by taking advantage of the legal instrument especially after The Great Compendium Clarifying Ethical Norms was published. The autocratic political structure concentrated on the emperor was settled down and the emperor's political faction monopolized the government and politics excluding most of the new officials who had supported emperors' side in the ritual controversy at first. Thus The Great Ritual Controversy began with the ritual problem, but ended with the establishment of a new royal lineage and the construction of an autocratic emperor's political structure, and the emergence of a new political force supporting Jiajing emperor, which system caused the breakaway of the new officials who had supplied the ideological foundation for emperor on the ritual controversy under the emperor's neglection of politics and the privatization of the political power by emperor himself. The innovation pursued by the new officials stopped here, which might also mean the limit of the emperor-centered autocratic political structure in Ming China. The issue whether the politics after the Great Ritual Controversy would succeed to the innovative policy suggested by the new political force or would return to the traditional ritual order should be reexamined in the context of the real operation of politics and the dynamic relation among the different political forces.

참고문헌 (50)

  1. "霍文敏公文集" (1962), 中華書局
  2. "明 世宗實錄" (1976),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
  3. "明史紀史本末" (1968), 臺灣商務印書館
  4. "明史" (1980), 鼎文書局影印本
  5. "明通鑑" (1999), 岳麓書社
  6. "張文忠公集" (1967), 成文出版社
  7. "皇明詔令" (1995), 上海古籍出版社
  8. 南炳文, "明史" (1985), 人民出版社
  9. 譚天星, "明代內閣政治" (1996),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0. 杜乃濟, "明代內閣制度" (1967), 臺灣商務印書館
  11. 毛奇齡, "辦定嘉靖大禮議", 四庫全書本
  12. 沈德符, "萬曆野獲編" (1983), 新興書局
  13. 衣凌, "明史新編" (1993), 人民出版社
  14. 李洵, "下學集" (2006), 中国社會科學出版社
  15. 林延淸, "嘉靖皇帝大傳" (1993), 遼寧敎育出版社
  16. 田濤, "嘉靖革新硏究" (2015), 社會科學出版社
  17. 錢明, "陽明學的形成與發展" (2002), 江蘇古籍出版社
  18. 趙翼, "卄二史箚記" (1974), 世界書局 影印本
  19. 竤, "玉堂叢語", 四庫全書本
  20. 胡吉勛, "大禮議”與明廷人事變局" (2007),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1. 胡凡, "嘉靖傳" (2004), 人民出版社
  22. 黃雲眉, "明史考證" (1986), 中華書局
  23. 윤정분, "嘉靖年間 ‘大禮議’의 연구동향과 몇 가지 의문점 재검토 - 특히 국내 연구를 중심으로 -", 중국사연구, (97), pp.139~175 (2015), 중국사학회
  24. 윤정분, "弘治年間(1488-1505)의 經筵과 政局運營 - 내각제 복원과 공론정치와 관련하여-", 중국사연구, (73), pp.117~148 (2011), 중국사학회
  25. 윤정분, "嘉靖前期(1522-1528) ‘大禮議’ 政局과 經筵", 중국사연구, (92), pp.207~255 (2014), 중국사학회
  26. 曺永祿, "嘉靖初 政治對立과 科道官 -大禮議를 중심으로-", 東洋史硏究, 21 (1985)
  27. 關文發, "明代政治制度硏究" (1995),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8. 歐陽琛, "王守仁與大禮議", 新中華, 12(7), pp.~1 (1949)
  29. 南炳文, "嘉靖前期的大禮議", 故宮博物院刊, 1983(2) (1983)
  30. 鄧志峰, "誰與靑天掃舊疊” -“大禮議”思想背景新探", 學術月刊, 1997(7) (1997)
  31. 常建華, "明代宗族祠廟祭祖禮制及其演變", 南開學報, 2001(3) (2001)
  32. 小島毅, "嘉靖の禮制改革について", 東洋文化硏究所紀要, 117 (1992)
  33. 梁希哲, "明淸政治制度論述" (1991), 吉林大學出版社
  34. 閻愛民, "大禮議”之爭與明代的宗法思想", 南開史學, 1991(1) (1991)
  35. 吳銳, "論‘大禮議’的核心問題及其影響", 明史硏究, 13 (1991)
  36. 王柏中, "明嘉靖年間的廟制度變革問題試探", 社會科學戰線, 2001(2) (2001)
  37. 李亮, "左順門事件 -大禮議的轉折-", 河北理工大學學報(社會科學版, 10(2) (2010)
  38. 李洵, "大禮議與明代政治", 東北師大學報(哲學社會科學版), 5 (1986)
  39. 林延淸, "蔣太后與大禮議", 史學集刊, 2008(5) (2008)
  40. 張璉, "從大禮議看明代中葉儒學思潮的轉向", 明淸史集刊, 1997(3) (1997)
  41. 張立文, "論“大禮議”與朱熹王陽明思想的衝突", 南昌大學學報(人社版), 1999(2) (1999)
  42. 翟愛玲, "大禮議”事件的政治意義與嘉靖前期的政治局勢", 史學集刊, 4 (2013)
  43. 鄭志峰, "嘉靖初年的政治格局", 復旦學報(社會科學版, 1999 (1999)
  44. 鄭台燮, "大禮議’의 典禮論 分析", 東國史學, 24 (1990)
  45. 趙克生, "明朝嘉靖時期國家祭禮改制" (2006), 社會科學文獻出版社
  46. 何淑宜, "皇權與禮制: 明嘉靖朝的郊祀禮改革", 中央史論, 22 (2005)
  47. 胡吉勛, "明嘉靖中天地分祠及明堂配享爭議關係之考察", 中國文化硏究所學報, 44 (2004)
  48. 黃進興, "道統與治統之間: 從明嘉靖9年(1530)孔廟改制(談起)", 歷史語言硏究所集刊, 61(4) (1990)
  49. 中山八郞, "明淸史論集" (1995), 汲古書院
  50. 中山八郞, "明淸史論集" (1995), 汲古書院

관련 논문AI추천

이 간행물의 다른 논문 (7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