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ERD
논문KCI 등재

보덕국의 탄생과 그 의미

The Foundation and Meanings of Bodeokguk

0

조회

0

다운로드

15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이 글은 報德國의 탄생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신라가 나당전쟁을 극복하고 일통삼한의 시기로 넘어가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가 바로 보덕국이다. 669년 안승은 신라에 來投한 후 670년 초 검모잠에 의해 漢城에서 고구려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미 신라로 내투한 안승이 다시 고구려고지인 한성으로 돌아감에 따라, 신라와 고구려유민의 유대는 더욱 긴밀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얼마 후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한반도 북쪽에서 전개되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고, 670년 6월 안승집단을 금마저에 안치하였다. 한편 670년 초 의상은 당이 신라를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오는데, 신라는 당의 해상공격에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안승을 비롯한 고구려유민을 금마저에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안승집단의 금마저 이주로 인해 신라와 웅진도독부 사이의 갈등은 표면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670년 7월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백제고지 82성을 공취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지는 시점인 670년 8월에 안승이 신라에 의해 고구려왕으로 책봉되었다는 점에서, 보덕국의 고구려유민이 신라에 백제고지 점령을 지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웅진도독부는 신라가 안승을 外援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당에게 알린다. 이러한 사실은 671년 신라와 당이 주고받은 편지인 「설인귀서」와 「답설인귀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후 당은 672년 석문전투를 감행한 이유, 674년 문무왕의 관작 삭탈의 명분으로 보덕국을 지목하였다. 보덕국의 고구려유민은 금마저에서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고구려식 체제재편에 주력했다. 보덕국의 고구려유민이 신라를 지원하면서 얻고자 한 것은 바로 고구려의 부흥 내지 재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백제고지에 대한 장악력이 높아진 674년 안승을 보덕왕으로 다시 책봉하였다. 그리고 사실상 676년 나당전쟁이 종료됨에 따라 신라의 보덕국에 대한 지배는 점차 노골화 되었다. 결국 683년 신라는 안승을 왕경으로 불러들이고 金씨 성을 사여함으로써, 보덕국의 해체를 기정사실화 하였다. 이에 보덕국의 고구려유민은 보덕성민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신라는 그 반란을 평정한 이후 주변지역을 정비함으로써 9주 5소경제를 완비하였다. 그리고 보덕국의 고구려유민의 일부는 9서당의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에 편성되었다. 곧 신라의 삼국통일을 의미하는 일통삼한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일통삼한은 신라가 영역적 의미에서 삼한의 지역을 차지하였음을 의미하고, 인적인 차원에서는 고구려유민을 포용한 삼국통일의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는 실제적으로는 삼국통일을 의미하는 일통삼한 의식을 가졌지만, 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일통삼한이란 표현을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신라는 당을 견제하고 백제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방편으로 고구려유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또한 신라는 보덕국의 정통성과 고구려유민을 매개로 삼국통일을 실현하였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the historical meanings in the foundation of Bodeokguk, which holds important significance in Silla overcoming the Silla-Tang War and entering the era of the unification of Three Hans. In early 670, Uisang informed Silla of the possibility that Tang might attack Silla, which deployed the Anseung group to Geummajeo to defend the nation from the marine attacks of Tang. As the Anseung group moved to Geummajeo, the conflicts between Silla and Woongjin Commandery surfaced. Silla took the chance and attacked and conquered 82 fortresses including Woongjin Commandery in July, 670, when the wandering people of Goguryeo in Bodeokguk volunteered to occupy the highlands of Baekje and have their legitimacy of Goguryeo recognized. Later Woongjin Commandery informed Tang of the fact that Silla took Anseung as its Oiwon. The fact was mentioned in "Seolinguiseo" and "Dapseolinguiseo," which were letters exchanged between Silla and Tang in 671. Tang risked the Seokmun battle in 672 and removed King Munmu from office in 674 under the cause of Bodeokguk. The wandering people of Goguryeo in Bodeokguk tried to revive or reconstruct Goguryeo by volunteering to support Silla, which stopped Tang from moving south along the land route by supporting the revival movement of Goguryeo, which developed in the highlands of Goguryeo until 673, and mobilized the wandering people of Goguryeo in the Anseung group to occupy the highlands of Baekje. In 674 when Silla's grasp over the highlands of Baekje increased, however, Anseung was installed as the king of Bodeokguk again. In 683, Silla summoned Anseung to Wangyeong and granted him the family name of Kim, thus making the dissolution of Bodeokguk a fact. The wandering people of Goguryeo in Bodeokguk rose in revolt as people of Bodeokguk. Silla suppressed their revolt and arranged the areas around it, completing the system of nine provinces and five Sogyeongs. Some of Goguryeo's wandering people in Bodeokguk were organized into the Byeokgeum and Jeokgeum Seodang of nine Seodangs. This does not mean that the unification of Three Hans, which signifies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by Silla, was completed. Here, the unification of Three Hans means that Silla took over the areas of Three Hans in terms of territory and unified the Three Kingdoms including the wandering people of Goguryeo in terms of people. Silla actually had the consciousness of Three Hans' unification to signify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but it stuck to the expression, unification of Three Hans, not to stimulate Tang. In the end, Silla accepted the wandering people of Goguryeo actively to check Tang and occupy the highlands of Baekje and won a victory in Silla-Tang War thanks to their support. It finally realized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via the legitimacy of Bodeokguk and the wandering people of Goguryeo.

참고문헌 (51)

  1. "삼국사기", ~
  2. "삼국유사", ~
  3. "자치통감", ~
  4. "신당서", ~
  5. "자치통감고이", ~
  6. "일본서기", ~
  7. 강경구, "高句麗 復興運動 新考察", 한국상고사학보, 47(47), pp.89~113 (2005), 한국상고사학회
  8. 김병남, "신라의 삼국통일 의식과 그 실제", 한국사상과 문화, (24), pp.145~174 (2004), 한국사상문화학회
  9. 金壽泰, "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1994), 一潮閣
  10. 김영하, "신라중대사회연구" (2007), 일지사
  11. 김영하, "7세기 후반 한국사의 인식문제 -신라의 백제통합론과 삼국통일론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46), pp.361~389 (2009), 한국사연구회
  12. 김영하, "一統三韓의 실상과 의식", 한국고대사연구, (59), pp.293~327 (2010), 한국고대사학회
  13. 노중국, "백제 부흥운동사" (2003), 일조각
  14. 노태돈, "三韓에 대한 인식의 變遷", 韓國史硏究, 38 (1982)
  15. 盧泰敦, "對唐戰爭期(669-676) 新羅의 對外關係와 軍事活動", 軍史, 34 (1997)
  16. 盧泰敦,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고구려관계기사 검토", 慶州史學, 16 (1997)
  17.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2009), 서울대출판부
  18. 노태돈, "7世紀 東亞細亞國際政勢의 變動과 新羅의 對應", 第4回新羅學國際學術大會 (2010)
  19. 서영교, "신문왕대 보덕성민의 반란과 핼리혜성", 인문학연구, 36(3), pp.225~254 (2009), 인문과학연구소
  20. 심정보, "百濟文化史大系硏究叢書6 -百濟의 滅亡과 復興運動-" (2007),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1. 신정훈, "新羅 宣德王代의 政治的 推移와 그 性格", 大丘史學, 65 (2001)
  22. 양기석, "新羅 五小京의 設置와 西原京", 湖西文化硏究, 11 (1993)
  23. 梁炳龍, "羅唐戰爭 進行過程에 보이는 高句麗遺民의 對唐抗爭", 史叢, 46 (1997)
  24. 유원재, "백제사에서 익산문화유적의 성격", 마한백제, 14 (1999)
  25. 李基東, "新羅 下代의 浿江鎭", 韓國學報, 4 (1976)
  26. 이기백, "韓國史 講座 古代篇" (1982), 一潮閣
  27. 이미경, "新羅의 報德國 지배정책", 대구사학, 120, pp.101~131 (2015), 대구사학회
  28. 이도학, "熊津都督府의 支配組織과 對日政策", 白山學報, 34 (1987)
  29.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 (1977), 乙酉文化社
  30. 이상훈, "나당전쟁 연구" (2012), 주류성
  31. 이재석, "7세기 후반 報德國의 존재 의의와 왜국", 일본역사연구, (31), pp.33~52 (2010), 일본사학회
  32. 이정빈, "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과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 현실, (72), pp.131~157 (2009), 한국역사연구회
  33. 이호영, "新訂 新羅三國統合과 麗·濟敗亡原因硏究" (2001), 書景文化社
  34. 임기환, "강좌한국고대사 10" (2003), 가락국사개발연구원
  35. 임기환, "고구려정치사연구" (2004), 한나래
  36. 林炳泰, "新羅小京考", 歷史學報, 35-36 (1967)
  37. 전주현, "670년에 재건된 ‘고구려국’에 대한 연구", 력사과학, 82(2) (1982)
  38. 전진국, "三韓의 용례와 그 인식", 한국사연구, (173), pp.1~38 (2016), 한국사연구회
  39. 전용호, "익산 왕궁성의 구조에 대한 연구 성과와 논쟁점", 마한백제문화, 25, pp.233~288 (2015), 마한백제문화연구소
  40. 鄭求福, "譯註 三國史記 3" (199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1. 정선여,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 유민의 동향 - 報德國 주민을 중심으로 -", 역사와 담론, (56), pp.71~106 (2010), 호서사학회
  42. 정선여, "新羅 神文王代 報德國民의 반란", 역사와 담론, (66), pp.35~68 (2013), 호서사학회
  43. 조법종, "고구려유민의 백제 金馬渚 배치와 報德國", 한국고대사연구, (78), pp.97~138 (2015), 한국고대사학회
  44. 조인성, "고구려의 정치와 사상" (2007), 동북아역사재단
  45. 朱甫暾, "金庾信의 政治志向-연구의 活性化를 기대하며-", 신라사학보, 11 (2007)
  46. 朱甫暾, "김춘추와 그의 사람들" (2018), 지식산업사
  47. 최재도, "漢城의 高句麗國 再檢討", 동북아역사논총, (47), pp.139~169 (2015), 동북아역사재단
  48. 池內宏, "高句麗滅亡後の反亂及ひ唐と新羅との關係",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2 (1927), 東京帝國大學文學部
  49. 池內宏, "滿鮮史硏究 上世策二冊" (1960), 吉川弘文館
  50. 村上四男, "新羅と小高句麗國", 朝鮮學報, 37-38 (1966)
  51. 村上四男, "朝鮮古代史硏究" (1978), 開明書院

관련 논문AI추천

이 간행물의 다른 논문 (8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