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ERD
논문KCI 등재

新羅의 報德國 지배정책

Silla's Policy for Ruling Bodeokguk

0

조회

0

다운로드

19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이 글은 7세기 신라의 내외부의 변화에 따른 報德國의 생성과 解體과정에서 나타나는 신라의 양면적인 지배정책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와 당의 갈등은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 故地에 남은 유민에 대해 당과의 전투를 직접 지원하거나, 安勝을 전면에 내세워 여타의 고구려 유민 세력을 統制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한 안승 집단을 金馬渚에 安置함으로써 이 지역의 안정적인 지배를 확보함과 동시에 백제 유민을 견제하였다. 나당 전쟁기인 675년에 신라가 당에 보낸 謝罪使는 비록 전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지만, 674년에 삭탈되었던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675년의 사죄사는 안승이 報德王에 책봉된 것을 당의 침공명분을 稀釋시키는 용도로 보덕의 의미를 활용하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목적은 ‘(신라에게)報德’이라는 뜻이었다. 나당전쟁을 앞두고 신라는 金馬渚의 고구려 유민 집단에게 신라에 거주하는 구성원으로써 당과 대적해야하는 임무를 부여한 것이었다. 679년 당의 서역전선이 안정세로 돌아서면서 문무왕은 당의 침략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이에 문무왕은 耽羅를 경략하고, 王京을 중심화하려는 기획 하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하였다. 문무왕에 이어 즉위한 신문왕은 金欽突을 숙청하고, 집권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안승을 진골 귀족으로 삼았다. 나아가 684년에 발발한 報德城民의 난을 진압하면서 보덕국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보덕국이 가졌던 유효한 성분들을 지방에 대한 정비와 九誓幢의 개편에 활용하며 고구려 유민의 역량을 흡수하였다.

Abstract

This study looked into Silla's ambivalent policy of ruling in the processes of the foundation and deconstruction of Bodeokguk in the 7th century. After Goguryo fell, the conflict between Silla and Tang was revealed in earnest. Silla controlled other powers of Goguryo refugees(高句麗 遺民) by supporting their battles against Tang directly or making Anseung(安勝) stand at the front. Also, it had the Anseung group live in Geummajeo(金馬渚) to hold Baekje refugees in check. Although the delegate of apology Silla dispatched to Tang in 675, the Silla-Tang War(羅唐戰爭) period could not stop the war, it recovered King Moon-Mu's office and peerage. Before the delegate of apology went in 675, Silla installed Anseung on the throne of King Bodeok. Bodeok(報德) actually meant that it should repay Silla's virtue before Silla-Tang War. However, in 675 with ‘a name of Bodeok of repaying Tang's virtue,’ it was used as a diplomatic skill to dilute Tang's justification for the invasion. As Tang's front of countries bordering on Western China became stable in 679, King Moon-Mu got more anxiety about the aggression of Tang. Under his plan to rule Tamna(耽羅) and center Wanggyeong(王京), he carried out large scaled public works. King Shin-Moon purged Kim Heumdol, and in the process of maintaining the centralized system, he made Anseung as a Jingol(眞骨) noble. Moreover, as Silla put down the Rebellion of Bodeock Fortress People in 684, Bodeokguk was torn down. However, Silla absorbed effective components of Bodeokguk.

참고문헌 (53)

  1. "三國史記", ~
  2. "三國遺事", ~
  3. "唐會要", ~
  4. "新唐書", ~
  5. "玉海", ~
  6. "資治通鑑", ~
  7. "冊府元龜", ~
  8. "太平寰宇記", ~
  9. "日本書紀", ~
  10. 金壽泰, "新羅中代政治史硏究" (1996), 일조각
  11. 노중국, "백제 부흥운동사" (2003), 일조각
  12.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2009),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13. 박해현, "신라중대정치사연구" (2003), 국학자료원
  14. 서영교, "羅唐戰爭史 硏究-약자가 선택한 전쟁" (2006), 아세아문화사
  15. 강경구, "高句麗 復興運動 新考察", 한국상고사학보, 47(47), pp.89~113 (2005), 한국상고사학회
  16. 권덕영, "古代韓中外交史" (1997), 일조각
  17. 金壽泰,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上" (1994), 一潮閣
  18. 김영관, "就利山會盟과 唐의 百濟 故土 支配 政策", 선사와 고대, (31), pp.61~85 (2009), 한국고대학회
  19. 김진한,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 보이는 신라·당밀약 기사의 사료적 검토", 인문논총, 71(1), pp.253~277 (2014), 인문학연구원
  20. 김현숙, "고구려 붕괴 후 그 유민의 거취 문제", 한국고대사연구, 33, pp.75~98 (2004), 한국고대사학회
  21. 김호동, "唐의 羈縻支配와 北方 遊牧民族의 對應", 歷史學報, 137 (1993), 역사학회
  22. 金羲滿, "新羅 神文王代의 政治狀況과 兵制", 新羅文化, 9 (1992)
  23. 盧泰敦, "邊太燮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86), 三英社
  24. 盧泰敦, "對唐戰爭期(669-676) 新羅의 對外關係와 軍事活動", 軍史, 34 (1997)
  25. 盧泰敦,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고구려관계기사 검토", 慶州史學, 16 (1997)
  26. 박현숙, "百濟 武王의 益山 경영과 彌勒寺", 韓國史學報, (36), pp.329~355 (2009), 고려사학회
  27. 拜根興, "칠세기 중엽 나당관계 연구", 박사, 한국사, pp.2002
  28. 서영교, "신문왕대 보덕성민의 반란과 핼리혜성", 인문학연구, 36(3), pp.225~254 (2009), 인문과학연구소
  29. 신은이, "보덕국의 건국과 그 의미", 석사, 한국사, pp.2011
  30. 梁炳龍, "羅唐戰爭 進行過程에 보이는 高句麗遺民의 對唐抗爭", 史叢, 46 (1997)
  31. 兪元載, "百濟史에서 益山文化遺跡의 性格", 馬韓, 百濟文化, 14 (1999)
  32. 이동주, "新羅 ‘儀鳳四年皆土’명 기와와 納音五行", 역사학보, (220), pp.1~29 (2013), 역사학회
  33. 이기백, "韓國史 講座 古代篇" (1982), 一潮閣
  34. 李道學, "熊津都督府의 支配 組織과 對日本政策", 白山學報, 34 (1987)
  35. 이재석, "7세기 후반 報德國의 존재 의의와 왜국", 일본역사연구, (31), pp.33~52 (2010), 일본사학회
  36. 이정빈, "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과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 현실, (72), pp.131~157 (2009), 한국역사연구회
  37. 이케우치 히로시,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반란 및 당과 신라의 관계", 고구려발해연구, 48, pp.253~295 (2014), 고구려발해학회
  38. 林炳泰, "新羅小京考", 歷史學報, 35・36 (1967)
  39. 임기환, "강좌한국고대사 10" (2003),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40. 임기환, "고구려정치사연구" (2004), 한나래
  41. 전경효, "7세기 후반 나당관계와 김유신", 대구사학, 115, pp.1~36 (2014), 대구사학회
  42. 전준현, "670년에 재건된 ‘高句麗國’에 대한 연구", 력사과학, 82(2) (1982)
  43. 정선여,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 유민의 동향 - 報德國 주민을 중심으로 -", 역사와 담론, (56), pp.71~106 (2010), 호서사학회
  44. 정선여, "新羅 神文王代 報德國民의 반란", 역사와 담론, (66), pp.35~68 (2013), 호서사학회
  45. 조법종, "고구려유민의 백제 金馬渚 배치와 報德國", 한국고대사연구, (78), pp.97~138 (2015), 한국고대사학회
  46. 조인성, "고구려의 정치와 사상" (2007), 동북아역사재단
  47. 朱甫暾, "金庾信의 政治志向", 新羅史學報, 11 (2007), 신라사학회
  48. 진영일, "고대 탐라국의 대외관계", 耽羅文化, 30 (2007),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49. 최재도, "漢城의 高句麗國 再檢討", 동북아역사논총, (47), pp.139~169 (2015), 동북아역사재단
  50. 拜根興, "七世紀中葉唐與新羅關系研究" (2003), 中國社會科學出版社
  51. 黃約瑟, "薛仁貴" (1995), 西北大學出版社
  52. 池內宏, "滿鮮史硏究 上世2" (1960), 吉川弘文館
  53. 村上四男, "朝鮮古代史硏究" (1978), 開明書院

관련 논문AI추천

이 간행물의 다른 논문 (13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