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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신문왕대의 對唐外交와 一統三韓 표방

Silla's Diplomacy toward Tang and Advocacy for ‘Iltong-Samhan (Unification of Three Hans)’ During the Reign of King Sin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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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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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태종 묘호를 둘러싼 당과의 갈등에서 신라가 무열왕의 공업으로 주장한 일통삼한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하였다. 그를 통해 신문왕대 신라가 나당전쟁 이후 지속된 당과의 대립적 관계를 개선해 나가는 과정을 살필 수 있었다. 나당전쟁에서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을 격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안승과 보덕국 고구려 유민이었다. 이는 674년에 당이 “고구려의 항거하는 무리를 받아들여 백제 땅을 점령하여 지키게 하였다”라는 구실로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왕으로 세우면서, 신라를 침공하겠다고 선언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675년에 신라는 대당 사죄사를 파견하여 사죄하였고, 당은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676년 기벌포전투를 기점으로 나당전쟁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신문왕대까지 나당관계는 여전히 대립적이었다. 신문왕대 당은 무열왕의 태종 묘호를 이르러 ‘참람하다’라며 고치라 하였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당 태종의 묘호와 서로 저촉되었으나, 그가 생전에 어진 신하인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사를 돌보아 일통삼한하였으므로 그 공적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라고 대응하였다. 그 후 당은 더 이상 무열왕의 태종 칭호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무열왕의 태종 묘호를 둘러싼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문왕 12년조(692)에 실려 있다.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당과의 갈등을 봉합한 신문왕의 공업을 부각하기 위하여 그의 죽음에 앞서 서술한 것으로, 실제 무열왕의 태종 묘호를 둘러싼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이 발생한 시점은 684년으로 추정된다. 당 고종은 683년 12월에 죽었고, 그 뒤를 이어 중종이 즉위하였다가 684년 2월 측천무후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당이 무열왕의 태종 묘호를 문제 삼은 시점은 잠시나마 중종이 즉위하였던 684년인 것이다. 당이 무열왕의 태종 묘호를 문제 삼자, 신라는 그의 일통삼한의 공업을 강조하며 ‘태종’은 시호라고 주장하였다. 신라가 무열왕의 공업으로 일통삼한을 주장한 것은 당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외교적 술책이었을 듯하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의도로 이해된다. 첫째 무열왕의 백제 평정의 업적을 부각하여, 나당전쟁 동안 당이 문제 삼았던 안승과 보덕국 고구려 유민의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고 생각된다. 둘째, 신라는 무열왕의 공업으로 일통삼한을 주장하여, 나당전쟁은 끝났고 더 이상 당과의 갈등을 원하지 않음을 나타냈을 것이다. 셋째, 친당적 인물인 김춘추의 대당외교 활동을 상기시켜 당과의 대립적 관계를 해소하고자 하였을 듯하다. 신라는 683년에 보덕국의 왕 안승을 왕경으로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내려 골품제에 편입시켰다. 684년 신라는 보덕성민의 반란을 진압한 후 보덕국을 완전히 해체하였다. 이는 신라가 당의 침공 구실을 불식시켰음을 의미한다. 686년 신라는 당측에 예기와 예전을 요구하며, 그들의 군신적 세계질서에 편입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687년 신라는 오묘제를 시행하면서, 무열왕을 ‘태종대왕’이라 칭하며 시호로 나타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692년에 신문왕이 죽고 효소왕대에 이르러 나당관계는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Abstract

This study examined the meanings of ‘Iltong-Samhan (Unification of Three Hans)’ argued by Silla as King Muyeol's meritorious deed in its conflicts with Tang over Taejong, the temple name of the king during the reign of King Sinmun, tracing the process of Silla terminating its confrontational relationship with Tang after Silla-Tang War and restoring its relations with Tang. The Silla-Tang War, which began during the reign of King Munmu, ended after the Gibeolpo battle in the 16th year (676) of King Munmu's reign, but Silla-Tang relations remained confrontational even during the reign of King Sinmun. This is well verified in the fact that Tang asked Silla to change Taejong, the temple name of King Muyeol, after pointing out that it was “presumptuous” during the reign of King Sinmun. The 12th Jo (692) of King Sinmun of Samguksagi offers records about the conflict between Silla and Tang over Taejong, the temple name of King Muyeol. The compilers of Samguksagi, seem to have mentioned it before the death of King Sinmun to highlight his achievements as the king who ended the conflict between Silla and Tang and improved their relationship. As a matter of fact, the conflict between Silla and Tang over Taejong, the temple name of King Muyeol, began after Emperor Zhongzong ascended the throne following the death of Emperor Gaozong in December, 683 and was deposed by Wu Zetian in February, 684. Silla insisted that the temple name Taejong was a posthumous name to Tang, emphasizing King Muyeol's meritorious deed in ‘Iltong-Samhan (Unification of Three Hans)’. It is clear that Silla emphasized ‘Iltong-Samhan (Unification of Three Hans)’ as King Muyeol's meritorious deed and that it was Silla's diplomatic trick to resolve its conflict with Tang. This can be understood in three main ways. First, Silla tried to solve the issues involving Anseung and the wandering Goguryeo people in Bodeokguk with which Tang raised an issue during Silla-Tang War by highlighting King Muyeol's achievement in suppressing Baekje. Secondly, Silla insisted on ‘Iltong-Samhan (Unification of Three Hans)’ as King Muyeol's meritorious deed, showing its intention not to continue its conflict with Tang any longer after the end of Silla-Tang War. Finally, it is estimated that Silla tried to resolve its relations with Tang by reminding the dynasty of Kim Chun-chu's diplomatic activities with Tang as a Tang-friendly figure. In the sixth year (686) of King Sinmun's reign, Silla asked for the classics of rites and the rules of courtesy from Tang and was incorporated into its lord-vassal world order. Silla held Omyoje in the seventh year (687) of King Sinmun's reign, calling King Muyeol by his posthumous name, “Taejongdaewang.” After King Sinmun passed away in 692, Silla-Tang relations improved considerably during the reign of King Hyo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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