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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箕子 유적의 정비와 기자 인식

The Maintenance of the Gija(箕子) Remains and Transformation of Views on Gija in 17-18th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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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이 글은 기존에 역사서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던 조선시대의 箕子 인식을 기자를 제향하는 사당과 서원, 祠宇 등 기자와 관련된 유적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다시 살펴보고자 하였다. 17~18세기에 기자 유적의 정비가 진행되는 과정이 기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기억하고자 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특히 평양의 기자 유적은 조선의 국왕과 지식인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사신도 한 번쯤 방문하고자 한 장소였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기자의 사당은 조선 태종대에 箕子殿으로 명칭이 정해지고 세종대에 祀典에 등재되면서 정비가 일단락되었다. 15세기의 기자 인식을 보여주는 유적은 기자전에 세워진 箕子廟碑이다. 卞季良이 작성한 碑銘에는 箕子受封說, 中華와 東夷 등 기자를 중국과 연결하여 인식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는 기자의 사당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의 記文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기자전과 箕子墓를 정비하는 과정은 기자와 중국의 연관성, 명나라 사신의 기자 유적 방문 등이 고려되었다. 한편 이러한 인식은 임진왜란을 겪은 직후인 17세기 광해군대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기자전의 명칭은 崇仁殿으로 바뀌었다. 기존 연구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再造之恩 및 명나라와의 同類 의식이 강화된 결과로 기자 유적이 정비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평안도 유생과 李廷龜 등이 기자 제사의 禮를 높이고 후손인 鮮于氏가 대대로 제사를 잇도록 요구한 글에서는 기자와 중국을 연결 짓는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정구가 작성한 箕子廟碑를 보면 15세기의 箕子受封說과 기자의 敎化에 대한 해석은 보편적인 현상으로 변화하였다. 그는 기자를 箕聖으로 표현하며 하늘이 단군을 잇도록 하였다는 내용의 詩를 지었다. 17세기에 변화한 기자 인식은 평안도와 황해도에 기자를 제향하는 서원과 사우를 건립하고, 18세기에 기자를 제향하는 장소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려는 움직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평양의 仁賢書院에 봉안되었던 기자 그림이 정묘호란으로 인하여 사라지자, 평안도와 황해도 각지에서 그림의 진본을 주장하며 기자의 院宇를 건립하고 사액을 요구하였다. 18세기 영조 · 정조대에는 한양의 文廟와 전국 8도에 기자의 사당을 별도로 만들 것을 요구하는 유생의 공론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모두 기자가 조선에 끼친 功德이 孔子보다 작지 않음에도 기자의 사당이 공자를 제향하는 공간보다 적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처럼 17~18세기 기자 유적의 정비는 17세기를 기점으로 기자를 ‘중국의 기자’에서 ‘조선의 기자’로 만들어가고, 변화한 기자 인식을 확립하여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Abstract

This article attempted to examine the perception of Gija(箕子), which had previously been analyzed mainly in historical books, through the process of maintaining the remains of Gija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The name of the country, Joseon(朝鮮), comes from Gija Joseon. Therefore, Joseon revered Gija as the progenitor of the country. Gijajeon(箕子殿), a space to revered Giza, began to be maintained in the early 15th century. The perception of GiJajeon changed when the envoy of the Ming(明) Dynasty of China visited there. The connection between the place and China was considered a lot when the envoy of the Ming Dynasty visited GiJajeon. A visit to the Confucian shrine, where Confucius(孔子)'s memorial service was held, was recommended first to the Chinese envoy, and GiJajeon was next. In the 15~16th centuries, Gija's status fell short of Confucius. In the early 17th century, GiJa's shrine was renamed from Gizajeon to Soonginjeon(崇仁殿). ‘Soongin(崇仁)’ means to worship In(仁), which Confucius claimed. However, the name of Gija's shrine was given to Gija, not Confucius, as a symbol of In(仁). It also shows that the status of the GiJa has changed to a position equivalent to Confucius. This change can also be found in the term ‘Gisung(箕聖)’, which describes a Gija as an saint. The Joseon intellectuals who visited the ruins of Gija in the 17~18th centuries did not leave a record of what they thought of linking this place with China. Through this, it can be proved that the process of maintaining the remains of Gija is not the result of loyalty and respect for China. This process and perception is also confirmed in the process of building a seowon(書院) and a shrine to store the Gija's paintings. During the Joseon Dynasty, six spaces were built to store Gija's paintings. The painting, which was kept at Inhyeonseowon(仁賢書院) in Pyongyang, disappeared through the Chinese Invasion of Joseon in 1627(丁卯胡亂). As the original disappeared, many regions began to build a shrine for Gija, claiming that their paintings were genuine. The people who built these spaces raised a problem with the fact that Gija's shrine was less than Confucius's. They needed to build a shrine for Gija, which was superior to Confucius, and hoped that the state would recognize this shrine. In the 18th century, the public opinion of intellectuals to establish a shrine for Gija nationwide was conveyed to the state. Unlike the 15~16th centuries, the maintenance of the remains of Gija in the 17~18th centuries and the recognition reflected in them were carried out in the process of making Gija in China into a Gija in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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