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기자의 위상 변화와 조·청 외교에서의 활용 양상
The Changing Status of Gija in the Late Joseon Period and Its Use in Joseon-Qing Diplom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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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논문에서는 조·청 관계에서 기자가 활용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명·청 교체 이후 조선 내부에서는 ‘교화 군주’ 기자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소중화 조선’과 ‘이적 청’을 구분짓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사신 외교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조선의 원접사는 청 사신과 시문을 수창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강제로 수창에 동원되는 경우에도 ‘책봉 제후’ 기자를 활용하지 않았다. 반면 청 사신의 경우,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기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기자를 통해 동질성을 확인하기보다는 청의 정치적 우위를 과시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책봉 제후’ 기자의 이미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외교문서 안에서 ‘책봉 제후’ 기자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청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였다. 이는 청과의 마찰을 원하지 않았던 조선의 대응책 중 하나였다. 다만, 정조대에 이르면 보다 적극적으로 기자가 활용되는데, 이는 정조대를 기점으로 조·청 외교 전략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청의 경우 외교문서 안에서 기자를 활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자가 한·중 관계의 오랜 상징으로서 기능해왔음을 청의 위정자들이 인지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조선과 청은 엇갈린 행보를 지속하였다. 기자 활용이 일방통행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은 조·청 관계가 전형적 조공관계에서 벗어나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은 청을 중화로 인정하지 않았고, 청 역시 전통적인 중화질서의 세계관으로 조선을 사유하지 않은 것이다.
Abstract
This paper aims to examine ways of using Gija in the Joseon-Qing diplomacy. After the Ming dynasty was replaced by the Qing dynasty, Joseon internally began to distinguish “Lesser middle Kingdom Joseon” from “the barbarian Qing” by using the image of Gija as “an edifying monarch”. This perception also had an influence on the envoy diplomacy. Joseon’s “head of reception preparation” escorted the envoy of the Qing, but in most cases without exchanging poems. Nor did he quote “the Feudal Lord” Gija in poems, even when he was directed to compose them for the Qing delegation. On the other hand, the Qing’s envoy began to quote Gija in their poems from the 18th century. However, their aim was to boast Qing’s political superiority rather than to identify the homogeneity with Joseon through the quotation of Gija. However, the representation of Gija as ‘the Feudal Lord’ was by no means disappearing. Joseon expressed loyalty to Qing by presenting the image of ‘the Feudal Lord’ Gija, in diplomatic documents. This was one of the typical methods which Joseon chose to avoid friction with Qing. However, the fact that Gija came to be used more often from the reign of King Jeongjo suggested a change in the Joseon-Qing diplomacy strategy. By contrast, Gija was rarely mentioned in diplomatic documents of Qing in the same period. This was probably because the Qing rulers recognized that Gija had functioned as a long-standing symbol of Korea-China relationship. As such, moves of Joseon and Qing continued to be conflicting. The repeated quotation of Gija indicated that Joseon-Qing diplomacy deviated from the typical tribute relationship. Joseon did not acknowledge Qing as the core of Sino-centric world and on the other hand Qing did not think of Joseon in terms of traditional chinese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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