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산문(Prosa)' 개념과 그 의미 연구
Untersuchung zu Hegels Begriff der ‘Prosa’ und ihrer Bedeutung
권정임
초록
일반적으로 헤겔은 ‘예술의 종말’을 선포한 고전주의자로서 낭만주의를 비롯해 근대의 사회적 상황과 예술 전반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베를린 미학강의들에 담겨있는 헤겔의 사유를 섬세하게 추적하면 근대 예술에 대한 그의 다양한 숙고들이 파악된다. 본 연구는 근대 예술에 대한 헤겔의 숙고들을 무엇보다 근대의 시대적 상황과 예술의 특성에 대한 그의 규정들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산문(Prosa)’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본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먼저 시와 대립적이지 않았던 산문의 본래적 의미와 18/19세기에 점차 예술일반의 형식으로 산문의 요구가 확장되었던 상황들을 헤겔 사유의 형성맥락으로 살펴본 후, 헤겔에서의 “산문(Prosa)” 혹은 “산문적(prosaisch)”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여러 문맥에서 분석하여 근대 예술에 대한 그의 입장을 고찰한다. 헤겔에 있어서 ‘산문’ 혹은 ‘산문적’이란 ‘이분적인 것’, ‘오성적인 것’, ‘일상적이고 범속한 것’, ‘세속적인 것’, ‘자연적인 것’, ‘우연한 것’, 또는 ‘사유가 지배적인 것’, ‘역사적 서술’ 등 매우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며, 이 용어로 헤겔은 특정한 상황이나 예술형식을 부정적으로도 서술하지만,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상황이나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헤겔은 본 연구에서 예시되듯이, 산문적 특성을 지닌 당대의 예술들,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 소설 양식, 객관적 유머로서의 괴테의 <서동가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러한 예술들을 통해 근대 정신성에 부합하는 새로운 예술형식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렇게 볼 때 헤겔에게서 보이는 ‘산문’ 혹은 ‘산문적’이라는 표현은 무조건 부정적인 평가로 여겨져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 개념은 헤겔의 미학 체계에서 낭만적 예술형식의 마지막 단계(유머)의 주관화된 정신성과 외적인 것의 분리로 인한 ‘예술의 와해(Auflösung der Kunst)’ 앞에 놓인 예술의 존립 가능성을 진단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견해에서 본 연구는 ‘산문’ 형식이 헤겔적 의미의 ‘예술의 종말’ 이후 및 헤겔 이후의 근, 현대의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것과, 또한 ‘산문’은 헤겔 철학 내에서 예술에서 철학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는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예술이 단순히 와해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철학’을 결합하는 형식으로서 예술의 지속적인 존립을 담보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개념이라는 것을 밝혀본다. 나아가 본 연구에서 분석된 산문의 여러 가지 의미들은 증대하는 주관성으로 인해 내용과 형식의 극단적인 분리와 표현의 파편화를 보이는 근대 및 현대 예술의 특성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예술을 산문적인 것으로 총괄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산문’ 혹은 ‘산문적인 것’은 현재 주로 “알레고리”와 “숭고”로만 이해되고 있는 파편적이고 주관성이 강한 현대예술의 특성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핵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헤겔이 규정하는 산문은 예술에서 철학으로의 이행 속에 있는 예술형식이자 사유의 예술적 형식이어서 오늘날 예술의 철학화와 철학에 대한 요구를 충족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개념과 더불어 우리는 오늘날에 있어서의 헤겔 미학 혹은 예술철학의 의미를 새로이 조명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