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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엽 순창 향리사회의 城隍大神事跡 현판 제작의 배경과 과정

The Background and Process of Making the Board for the ‘City God’s deeds(城隍大神事跡)’ by Local Petty Officials in the mid-16th-century Sunchang cou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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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기타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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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명종 18년(1563) 무렵에 ‘城隍大神事跡’을 제목으로 하는 현판을 제작하게 된배경과 과정을 한층 심화하여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 작성된 글이다. 특히 16세기 중엽에 순창군의 鄕吏 사회가 현판을 처음 제작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한, 구래의 향리층 주도성황제가 위기에 빠진 상황 및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자 한 향리층의 노력을 부각하면서 현판제작의 과정을 파악하였다. 현판 제작의 배경과 과정은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도학 실천에 열중하였을 인물인 양응정은 군수로 부임한 이후 구래의 향리 주도 성황제를음사라 하여 금단하고 이를 삭망 시에 유교식으로 경건하게 치르는 성황제로 대체하도록 하였다. 순창군의 향리들은 향리 주도의 성황제가 중단된 위기 상황을 타개하는 일환으로 ‘城 隍大神事跡’ 현판을 제작하였다. 현판 작업의 핵심은 성황사 내에 보관되어 온, 고려 후기의 것으로 성황신에게 수여된 職 牒들을 현판에 옮겨 새겨 후세에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일을 통해 순창의 향리사회는 순창 성황신이 예전부터 국가로부터 여러 차례 직첩을 받은 특별한 존재임을 부각하여성황신의 정당성을 확보ㆍ강화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순창의 향리층은 군의土姓인 설씨이기도 하고 동국여지승람 순창군 인물 항목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설공검을성황신으로 삼으면서, 그리고 유교적 가치에서 보더라도 훌륭한 인물인 설공검을 성황신으로 모시면서, 이들 첩문을 새기는 현판에다가 동국여지승람의 설공검 행적도 함께 수록하였다. 또한, 현판 제작의 경위를 밝히는 글에서는 성황신=설공검이라는 등식을 창출하면서 설공검이 고려 후기 이래로 성황신이었다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고, 이와 맞물려 설공검이 성황신이 되고서 성황제는 국제로 치러졌고 성황신은 국가로부터 수차례 작첩을 받았다고 하는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냈다. 순창군의 향리 사회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순창의 성황신인 설공검은 양응정과 같은 이가 보더라도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역사 인물이고 과거에 國祭의 대상이었으며 여러 차례 국가로부터 爵牒을 받았던 존재라 칭송하여 성황신의 정당성을 확보ㆍ강화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위기에 처한 구래의 성황제를 구해내고자 하는 순창 향리 사회의 이 같은 노력은 결과적으로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중엽 이후로도 향리 주도의 성황제가 존속한 데서 그러하다. 특히 순창 지역 사례에서 눈에 띄는 점은 다른 지역 사례와 달리위기에 빠진 향리층 주도 성황제를 구해내고자 하는 향리 사회의 대응 노력이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라 하겠는데, 이것이 순창 지역 사례의 연구사적 의미라 할 수 있다.

Abstract

本稿は明宗18年(1563)頃に「城隍大神事跡」を題目とする懸板を製作した背 景と過程を一層深化して理解することを目指して作成された. 懸板製作の背 景と過程は概略的に次の通りである. 道學実践に熱中した人物の梁應鼎は郡守に赴任した後, 舊來の鄕吏主導城 隍祭を淫祀とみなして禁斷し, これを朔望時に儒教式に敬虔に行う城隍祭に 置き換えた. 淳昌郡の鄕吏らは鄕吏主導の城隍祭が中断された危機状況を打 開する一環として「城隍大神事跡」の懸板を製作した. 懸板作業の核心は, 城隍祠内に保管されてきた, 高麗後期のもので, 城隍神 に授与された職牒を懸板に移して刻んで後世に見せるものといえる. この仕事 を通じて, 鄕吏社會は淳昌の城隍神が以前から国家から何度も職牒を受けた 特別な存在であることを強調し, 城隍神の正当性を確保ㆍ強化しようとした だろう. これと並行して、淳昌の鄕吏層は郡の土姓である薛氏でもあり、東 國輿地勝覽淳昌郡の人物項目に最初に記録された薛公儉を城隍神にし, 儒教 的価値から見ても優れた人物である薛公儉を城隍神にしつつ, これらの牒文 を刻む懸板に加え, 東國輿地勝覽の薛公儉行蹟も一緒に収録した. また懸板 製作の経緯を明らかにする文では, 城隍神=薛公儉という等式を創出しなが ら, 薛公儉が高麗後期以来城隍神だったという新しい神話を作り, これと同時 に薛公儉が城隍神になった後, 城隍祭は国祭で行われ, 城隍神は国家から数回 爵牒を受けたという新しい叙事を作り出した. 淳昌郡の鄕吏社会は, このよう な作業を通じて, 淳昌の城隍神である薛公儉は梁應鼎のような人が見ても望 ましく模範的な歴史人物であり, 過去に国祭の対象であり、何度も国家から 爵牒を受けた存在だと称賛して, 城隍神の正当性を確保ㆍ強化しようとした だろう. 危機に陥った舊來の城隍祭を救おうとする淳昌鄕吏社会のこのような努力 は, 結果的には所期の目標を達成したといえる. 16世紀中葉以後でも鄕吏主導 の城隍祭が存続したことからそうだ. 特に淳昌地域事例で目立つ点は, 他の地 域事例とは異なり, 危機に陥った鄕吏層主導城隍祭を救おうとする郷里社会 の対応努力が具体的に確認される事実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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