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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후반 백제의 대왜 관계와 남조

5世紀後半 百濟の對倭關係南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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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백제의 대왜관계는 개로왕대를 기점으로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왜는 비유왕이 보낸 왕녀 지진원을 채녀로 삼는가 하면, 송나라에 백제를 포함한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려는 시도를 통해 백제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노력을 국제사회에 표명하였다. 이에 백제는 적극적인 대송외교로 대응하였고, 이를 통해 대남조 외교에서 백제가 왜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인시킴으로써 왜의 노력을 무산시켰다. 이런 가운데 왜는 비유왕 사후 개로왕이 즉위하자 본격적으로 관계 변화를 모색한 듯하다. 왜왕이 자신에게 반발하여 백제계 이주민과 결합한 지진원을 화형시킨 것이다. 이는 더 이상 백제계 이주민을 의식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통제하겠다는 의사였다. 또한 왜는 대송외교도 계속 추진하였다. 하지만 송은 북위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백제를 더 중시해야 했기 때문에 왜의 거듭된 요구는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개로왕 역시 비유왕과 마찬가지로 왜의 의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개로왕은 더 이상 왕녀를 파견하지 않겠다고 하고 곤지를 파견하는 것으로 그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곧 왜의 군사지배권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과 백제계 이주민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곤지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주기 위해 자신의 부언을 주기도 하여 그 의도를 보다 확실히 하였다. 그러므로 개로왕대 백제는 이전과 달리 새로운 대왜 관계를 추구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의 웅진천도 이후 왜는 백제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변화를 모색하였다. 476年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 경과를 설명하는 왜의 태도는 계획적인 것이었다. 곤지의 477年 귀국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왜는 곤지를 통해서 백제와 왜의 관계를 새롭게 개선하려는 자신의 입장을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같은 해 왜는 대송외교도 추진하였는데, 이는 백제가 위기에 처하자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부각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송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때문에 이후 왜와 송의 관계는 오랜 기간 동안 단절되게 된다. 이후 왜는 한 차례 더 새로운 노력을 한다. 바로 동성왕의 귀국을 통해서였다. 동성왕을 귀국시킨 의도는 곤지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왜는 동성왕의 귀국을 그의 즉위에까지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는 왜의 대백제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실제로 왜왕이 보낸 군사들의 역할이나, 동성왕 모계와 왜 왕실의 관계는 확실히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곤지와 동성왕을 친왜계 인물로 보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동성왕은 개로왕이 추구한 대송외교의 목표를 그대로 따랐다. 또한 동성왕이 가진 대왜정책은 개로왕과 그의 아버지인 곤지와 동일한 것이었다. 동성왕대는 왜에서 귀국하여 왕이 된 인물이 다스린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왜와의 교류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전반적으로 양국의 관계가 단절되었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한편 동성왕은 남제에 내속을 청함으로써 자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으며, 왜의 대남조 외교에도 대응하고자 하였다.

Abstract

百濟の對倭關係は蓋鹵王代を起點として大きな變化を見せる. 倭は毗有王が選った王女池津媛を采女としたり, 宋に百濟を含む韓半島南部の支配權を認められる試圖を通じて百濟との關係を改めて定立しようとしたり, こんな努力を國際社會に表明した. よって百濟は積極的な對宋外交として對應し, 對南朝外交で百濟が倭より優位に立つことを確認させ, 倭の努力を霧散させた. このような雰圍氣のなか倭は毗有王死後, 蓋鹵王が卽位すると本格的に關係變化を摸索したようだ. 倭王が自身に反撥して百濟系移住民と結合した池津媛を火刑させた. これはこれ以上 百濟系移住民を意識せず積極的に統制するという意思であった. また倭は對宋外交も繼績推進した. でも宋は北魏との關係を考慮すると百濟の方をもっと重視する必要があって, 倭の重なる要求はやっぱり受け入れなかった. 一方, 蓋鹵王も毗有王と同じく倭の意圖を容納しなかった. 蓋鹵王はこれ以上王女を派遣しないと昆支を派遣することで自分の意見を披瀝した. すなわち, それは倭の軍事支配權主張を受け入れないことと百濟系移住民達を保護するということだった. ともに昆支の政治的立地を高めるために自身の婦人を讓ることによってその意圖をより確實にした. それゆえ蓋鹵王代百濟は以前と違う新しい對倭關係を追い求めたとしても違いはない. 百濟の熊津遷都以後, 倭は百濟の狀況を注視しながら變化を摸索した. 476年, 百濟と高句麗との戰爭經過を說明する倭の態度は計劃的なものだった. 昆支の477年歸國もこれと關係があるはずだ. 倭は昆支を通じて百濟と倭との關係を改善して自身の立場を博達できると考えた. この年, 倭は對宋外交も推進した. これは百濟が危機に直面しているうちに亞細亞國際關係の中で自身の位置を確實に浮刻しようとすることであった. でも宋は受け入れなく, 以後倭と宋との關係は長い間斷絶されることになる. 以後倭はもっと新しい努力をする. それは東城王の歸國であった. 東城王を歸國させた意圖は昆支の場合と同じであった. 同時に倭は東城王の歸國を彼の卽位にまで連結して, 倭の對百濟關係を改めて設定しようとした. 實際に倭王が送った軍士の役割とか, 東城王母系と倭王室との關係は確實にするには難いところがある. よってこんな点を根據として昆支と東城王を親倭系人物として認識することは再考の餘地がある. 東城王は蓋鹵王が追求した對宋外交目標をそのまま受け繼いだ. また東城王の對倭政策は蓋鹵王と父である昆支が開いた政策と同一なものだった. 東城王代は倭から歸國して王になった人物が支配した時期でもかかわらず倭との交流事實が具體的に確認されない, これは全般的に兩國の關係が斷絶したと把握するのが良いと思う. 一方, 東城王が南齊に內屬申請して自國が國際的に孤立されることを防止しようとしながら, 倭の對南朝外交も對應しよう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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