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ERD
논문KCI 등재

間島 영유권 분쟁의 역사적 전개와 전망

Historical Development and Prospect of Ownership Dispute on Kando(Chien-tao) between Korea and China in Modern Times

0

조회

0

다운로드

6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주제분류기타인문학

초록

본고는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간도 영유권 관련 연구의 개황을 심층적으로 살펴보고, 미래를 전망해 보고자 작성되었다. 특히 글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가급적 1차 자료들을 제시함으로써, 앞으로의 간도 논의들이 더 이상 소모적인 논란거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유의하였다. 숙종 36년(1710) 평안도 渭原에서 李萬枝 사건이 발생하였다. 청 성조는 두 나라의 경계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烏喇摠管 穆克登을 조선에 보내 공동 査界를 요구하였다. 숙종 38년(1712) 5월 穆克登의 주도하에 ‘西爲鴨綠 東爲土門’을 골자로 하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졌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과 청측에서는 두만강과 토문강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에서는 穆克登의 요구대로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을 잇는 設柵 공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 강이 두만강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청은 태종(1626~1643) 때 開原 威遠堡에서 압록강 어귀까지, 康熙 20년(1681)에는 개원 위원보에서 舒蘭二道河子까지 柳條邊을 수축하였다. 때문에 압록강·두만강과 유조변 중간에는 무인지역이 만들어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정축년(1877) 경부터 종성과 온성 부근의 土民이 두만강과 해란강 접점의 삼각주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개간이 두만강 대안 백두산 동록 전체로 확대되면서 이를 총칭하여 間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국에서는 이를 古林邊界라고 칭했는데, 조선에서는 그후 이를 墾島라고도 칭하였다. 구한국 정부는 20세기 초에 청국과의 간도 유민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 일관되게 ‘墾島’라는 명칭만을 사용하였다. 조선 변민들이 간도에 들어가 그곳을 개척하여 우리 영토화 했다는 능동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다가 1904년에 ‘北間島’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본고에서는 간도 영유권 분쟁에 관한 문제들을 시간순에 따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문제시될 수 있는 역사적 맥락들을 짚어보고자 하였다. 다각적 시각에서 간도분쟁의 심층적 이해와 전망에 도움이 되는 부분들만을 주로 다루었다.

Abstract

This paper has got written to review past researches on Kando(Chien-tao) and to prospect thefuture situation of it. Especially I have mainly used the primary source to write this paper becauseI have concerned about for arguments on Kando(Chien-tao) to fall into consumptive conflict. In 36th year of King Sukjong’s era(1710), Yi Man-ji’s accident happened in Wi-won city, northPyongan province. The Ching Emperor Sŏngjo has confirmed that the accident might happenedfrom unclear border between Chosŏn Dynasty and Ching Empire, so ordered Ching’s delegateMok Kuk-dong to survey around the border with delegate of Chosŏn Dynasty. On May in 38thyear of King Sukjong’s era(1712), Mok Kuk-dong erected a stone monument on the southernslope of Mt. Baekdu inscribing “West bordering Yalu River, East bordering Tumen River”. Untilthis time, men of Chosŏn Dynasty and Ching Empire thought Tumen River is same as DumanRiver. And then men of Chosŏn Dynasty found out difference of both in the course of setting upfences from a stone monument of Mt. Baekdu to Tumen River Mok Kuk-dong had appointed. Ching China had set up Liutiao Bian(Willow Palisade) from Kaiyuan city, Liaoning provincethrough Shulan city, Jilin province in 17th century. Therefore there was no-man’s-land in themiddle area between Yalu River, Duman River and Liutiao Bian. From around 1877 on, people inJongsŏng and Onsŏng cities cleared waste lands across Duman River and the eastern area of Mt. Baekdu. It was totally called Kando(間島:middle area). Ching China called it Old Border Land. Chosŏn Dynasty also called it Kando(墾島: cultivatedland) later. Daehan Empire only used Kando(墾島:cultivated land by Korean) consistently inearlier 20th century while having trouble with Ching China about Korean people in Kando. Itmight be an intention for Daehan Empire to emphasize that Kando was cultivated by Koreanpeople. Thereafter the name Nothern Kando appeared in 1904. In this paper, I tried to consider problems concerned with ownership dispute of Kando in chronological order and to indicate controversial points. This paper touched points helpful to understand and prospect ownership of Kando in versatile viewpoint.

참고문헌 (56)

  1. "太宗實錄", ~
  2. "世宗實錄", ~
  3. "肅宗實錄", ~
  4. "英祖實錄", ~
  5. "高宗實錄", ~
  6. "同文彙考", ~
  7. "備邊司謄錄", ~
  8. "淸聖祖實錄", ~
  9.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10. 金正中, "奇遊錄", ~
  11. 金指南, "北征錄", ~
  12. 安鼎福, "順菴集", ~
  13. 李 縡, "陶菴先生集", ~
  14. 李鍾徽, "修山集", ~
  15. 李獻慶, "艮翁先生文集", ~
  16. 丁若鏞, "與猶堂全書", ~
  17. 洪世泰, "白頭山記", ~
  18. 洪良浩, "耳溪集", ~
  19. 國會圖書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 (1975)
  20. 장상훈, "한국 고지도의 역사" (2011), 소나무
  21. 盧啓鉉, "증보 조선의 영토" (2001),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2.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下" (1975), 서문문고
  23. 송기호, "동아시아의 역사분쟁" (2007), 솔
  24. 이종석, "북한 ‒ 중국관계 1945~2000" (2000), 중심
  25. 李漢基, "한국의 영토" (1969), 서울대출판부
  26. 李花子, "한중국경사 연구" (2011), 혜안
  27. 篠田治策, "간도는 조선땅이다" (2005), 知詵堂
  28. 姜龍範, "近代中朝日三國對間島朝鮮人的政策硏究" (2000), 黑龍江朝鮮民族出版社
  29. 金春善, "延邊地區朝鮮族社會的形成硏究" (2001), 吉林人民出版社
  30. 佟連發, "國際法學" (2003), 北京大學出版社
  31. 吉林省革命委員會外事辦公室, "中朝中蘇中蒙有關條約協定議定書滙編" (1974)
  32. 楊昭全, "中朝邊界史" (1993), 吉林文史出版社
  33. 長白朝鮮族歷史資料編寫委員會, "長白朝鮮族歷史資料" (2002), 白山市依山印刷有限責任公司
  34. 趙建文, "國際法新論" (2000), 法律出版社
  35. 강석화, "조선 후기 백두산에 대한 인식의 변화", 조선시대사학보, (56), pp.195~224 (2011), 조선시대사학회
  36. 강석화, "조선후기의 북방영토의식", 한국사연구, (129), pp.95~115 (2005), 한국사연구회
  37. 姜錫和, "1712년의 朝·淸 定界와 18세기 朝鮮의 北方經營", 震檀學報, 79 (1995), 진단학회
  38. 金燦奎, "間島의 領有權", 한국북방학회논집, 1 (1995), 한국북방학회
  39. 김춘선, "北間島地域 韓人社會의 形成과 土地所有權 問題", 전주사학, 6 (1998), 전주대 역사문화연구소
  40. 김춘선, "광복후 중국 동북지역 한인들의 귀환과 정착", 해방 후 중국 지역 한인의 귀환문제 연구 (2003),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41. 김태국, "청산리전쟁 전후 북간도지역 일본영사관의 동향과 그 성격", 한국사연구, 111 (2000), 한국사연구회
  42. 남동현, "간도협약의 국제법적 효력과 Cyber VANK의 기능", 과학기술법연구, 11(2), pp.243~299 (2006), 과학기술법연구원
  43. 盧啓鉉, "간도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연구", 연세경제연구, 9(1) (2002), 연세대 경제연구소
  44. 박선영, "간도협약의 역사적 쟁점과 일본의 책임", 중국사연구, (63), pp.167~204 (2009), 중국사학회
  45. 박선영, "서간도, 동간도가 명기된 참모본부 지도에 대하여: 중화민국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에서 새롭게 발견한 간도 자료", 동양사학연구, (101), pp.299~318 (2007), 동양사학회
  46. 박선영, "中華民國 時期의 ‘間島’ 認識 -당시 출판된 신문 잡지의 ‘간도’ 기사를 중심으로-", 중국사연구, (69), pp.425~465 (2010), 중국사학회
  47. 배성준, "한·중의 간도문제 인식과 갈등구조", 동양학, (43), pp.339~357 (2008), 동양학연구원
  48. 裵祐晟, "書評‒ 姜錫和 著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韓國史硏究, 112 (2001), 한국사연구회
  49. 이규수, "일본의 간도영유권에 대한 인식과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 담론201, 9(1), pp.63~96 (2006), 한국사회역사학회
  50. 李瑄根, "白頭山과 間島問題‒ 回想되는 우리 疆域의 歷史的 受難", 歷史學報, 17 (1962), 역사학회
  51. 이성덕, "間島 歸屬과 관련한 몇 가지 국제법적 문제에 대한 管見", 중앙법학, 10(2), pp.367~398 (2008), 중앙법학회
  52. 이현조, "조중국경조약체제에 관한 국제법적 고찰", 국제법학회논총, 52(3), pp.177~202 (2007), 대한국제법학회
  53. 임계순, "한민족독립운동사 2" (1987), 국사편찬위원회
  54. 장계황, "간도에 관한 선행 연구의 특성 연구", 대한부동산학회지, 30(1), pp.229~253 (2012), 대한부동산학회[DOI]
  55. 장영숙, "일제시기 역사지리서에 반영된 間島 인식", 동아시아문화연구, (53), pp.295~328 (2013), 동아시아문화연구소
  56. 고바야시 레이코, "間島朝鮮人에 대한 裁判管轄權을 둘러싼 中日의 대립 -1909년-1915년-", 중국사연구, (79), pp.195~236 (2012), 중국사학회[DOI]

관련 논문AI추천

이 간행물의 다른 논문 (9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