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靑山鎭丙子戶籍과 섬 주민들의 생활상
Cheongsanjin Byungja family register(靑山鎭丙子戶籍) and lives of islanders at lat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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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세기 말엽 전라도 康津縣 『청산진병자호적대장』과 靑山鎭 소속 주민들의 생활상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17세기 서남해역에 수군진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조선 숙종 때 閔維重에 의해 제안되었다. 그가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자고 주장한 것은 우리나라 해역으로 출몰하는 왜구 때문이었다. 일본 왜구가 나가사키와 대마도를 출발하여 전라도를 침입할 때 가장 많이 이용했던 바닷길의 길목에 청산도가 입지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17세기 청산도에 萬戶鎭이 설치되고, 18세기에 別將鎭으로 대체되었으며, 19세기에 僉使鎭이 복설되면서 서남해역을 재편하였다. 조선시대의 수군진은 외형적으로는 해양방어 기능을 표방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섬 주민들에 대한 행정기능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19세기 말엽 청산도 수군진에서 부속도서 주민들의 인구와 호구를 파악하여 『청산진호적대장』을 작성한 것이다. 『청산진호적대장』은 필사본으로, 1876년에 수군첨사 徐泓淳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 자료에 수록된 인구정보는 전라도 강진현 부속도서인 청산도․여서도․소안도․자지도․횡간도 주민들로, 호구수 892호, 인구수 2,194명으로 추산된다. 『청산진호적대장』에 등재된 戶主를 기준으로 인구와 호구, 성씨와 본관, 신분과 직역, 자연촌 등을 분석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산도를 대표하는 성씨로 김해김․경주정․초계최․언양김․밀양박․충주지․나주임씨 등이 검출되었다. 이들이 정착한 자연촌에 관한 정보는 『청산진호적대장』과 『족보』 그리고 섬 주민들의 구술자료에서 일치하였다. 예컨대 김해김씨는 池口味, 경주정씨는 邑里, 초계최씨는 堂里, 충주지씨는 淸溪里, 나주임씨는 射亭里에 터를 마련하여 정착한 것으로 확인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청산진호적대장』에 등록된 섬 주민들의 인구구성인데, 남자 1,507명, 여자 687명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월등히 많았다. 또 섬 주민들의 신분과 직역의 경우 閑良․幼學․良人이 무려 94%를 점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9세기 말엽 청산진의 인구구성과 섬 주민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하였다.
Abstract
This writing was written to identify Cheongsanjin(靑山鎭) Byungja(丙子) family register in Jeolla-do(全羅道), Gangjinhyun(康津縣) and lives of Cheongsanjin residents at late 19th century. Discussion to set up the naval post at Southwestern sea in 17th century was suggested by Min Yu Joong(閔維重) at Joseon Dynasty, King Sukjong(肅宗). Reason why he asserted to construct the ocean defense system was because of appeared Japanese raiders in our country sea. Because of this reason, Manhojin(萬戶鎭) was constructed at late 17th century and replaced to Byeoljangjin(別將鎭) at 18th century and Southwestern Sea was reorganized as Chumsajin(僉使鎭) was recon structed at 19th century. Naval post at Joseon Dynasty externally claimed to stand for ocean protection function, but its practical purpose was the administrative function for islanders. Therefore, islander population and census in Cheongsando naval post at late 19th century were identified and Cheongsanjin family register was written. Cheongsanjin family register is a manuscript and was written by Sugunchumsa(水軍僉使), Seo Hong Soon(徐泓淳) in 1876. Population information in this record was about the residents in Cheongsando, Yeoseodo(麗瑞島), Soando(所安島), Jajido(者只島), Hoenggando(橫看島) which are the annexed islands of Gangjinhyun(康津縣) at Jeolla-do and the population was estimated to be 892 households and 2,194 residents. Based on the family heads which were registered in Cheongsanjin family register, population and census, surname and family clan, social status and occupational function and natural village were found. Surnames representing Cheongsando in this process were identified as Gimhae Kim(金海金), Gyeongju Jung(慶州鄭), Chogye Choi(草溪崔), Eonyang Kim(彦陽金), Miryang Bak(密陽朴), Chungju Ji(忠州池) and Naju Im(羅州林). Information about the natural village where these families settled down exactly agrees with Cheongsanjin family register identified by the naval post, the genealogy housed as each surname and oral data informed by the islanders. In other words, Gimhae Kim prepared for the ground and settled down at Jigumi(池口味), Gyeongju Jung did at Eupri(邑里), Chogye Choi did at Dangri(堂里), Chungju Ji did at Cheonggyeri(淸溪里) and Naju Im did at Sajungri(射亭里). Interesting truth shows that islanders who were registered in Cheongsanjin family register were 1,507 males and 687 females and males residents were significantly larger than female residents. Additionally, in case of social status and occupational function of islanders, Hanryang(閑良), Confucian(幼學) and Yangin(良人) occupied as much as 94%. How are these social phenomena interpreted? Population composition and lives of islanders at island areas in late 19th century were reorgan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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