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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영동지역 진출과 관할 방식

Koguryo’s Entry into the Yongdong Area and Its Jurisd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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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영동예 지역은 고조선, 한 군현 그리고 고구려의 지배를 차례로 경험하였다. 영동지역의 정치 변동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이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다. 현도군이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퇴축된 이후 동옥저의 읍락들은 부조현으로 편제되어 낙랑군의 통치를 받았다. 옥저를 제외한 영동지역의 다른 현들의 경우에도 임둔군이 폐치된 이후 현도군과 낙랑군의 지배를차례로 받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낙랑군으로 이속된 영동지역은 동부도위가 설치되어 토착 사회의 독자성이 크게 용인되었던 것으로 이해해 왔으나 오히려 낙랑군의 예하에서 철저한 군현 통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과정에서 토착 사회의 지배세력들이 군현지배에 참여하여 제한적이나마 그지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일부는 군치 지역으로 이주되기도 하였는데, ‘부조예군’이 대표적이다. 후한 광무제가 변경의 통치 방침을 수정하면서 낙랑군에도 변화가 있었다. 영동 7현을 관할하는 군사기구였던 동부도위를 폐지하였고, 토착의 거수를 현후로 봉하여 후국으로 삼았다. 영동지역에 대한 후한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고, 한편으로는 고구려가 점차 이 지역으로 진출해 왔고, 더 이상 후한 정부에서 의 장리 파견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늦어도 140년 무렵에는 영동지역이 낙랑군의 관할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동옥저를 복속시킨 고구려는 점차 남하하여 후한 말에는 옛 영동 7현의 대부분을 자치하게 되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동옥저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방식을 공납을 매개로 한 간접지배로 파악하고, 고구려가 복속지를 지배하는 전형적방식으로 이해해온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사료의 내용을 재검토한 결과, 고구려는 동옥저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지배를 시행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토착 지배층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지배에 참여시킨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지배방식은 이전 시기 한의 지배방식을 상당부분 수용한 결과로 이해된다. 한편 고구려가 동옥저를 지배한 방식을 영동지역 전체에 확대하여 적용할수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3세기 동옥저와 불내예의 존재 양태는 분명한 차이가있었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두 지역이 고구려에 복속된 시점은 100년여의 시차가 있었던 만큼, 고구려에 복속되기 이전의 상황도 차이가 있었다. 후한이 영동지역의 통치를 포기한 이후 불내예의 경우에는 불내후가 현정 체계를장악하고, 예하의 읍락들을 통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후 고구려역시 이러한 지배구조를 대체로 용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을 간접지배의형태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동옥저와 비하여 비교적 높은 독립성을 보장받았다고 볼 수 있다. 관구검의 침공 당시 동옥저와 불내예의 대응이 달랐던 것은 고구려의 지배방식,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예속도의 차이에서비롯된 결과로 이해된다.

Abstract

Yongdong Ye (嶺東濊) was ruled by Old Joseon, the Han (漢) counties and prefectures, and subsequently by Koguryo. Therefore, political changes in the Yongdong area are significant for the study of ancient Korean history. After the Hyundo (Xuantu) Commandery retreated to the northwest of Koguryo, towns in East Okcho (東沃沮) became subject to Bujo (夫 租) Prefecture under the Nangnang (Lelang) Commandery. Other prefectures were under the administration of the Hyundo Commandery and Nangnang Commandery with the withdrawal of the Imdoon (Lintun) Commandery. After the creation of Dongbudowie (the eastern sub-district of Nangnang), the Yongdong area was subject to Nangnang Commandery and was guaranteed its independence. However, the county and prefecture ruling system was well established under the control of Nangnang Commandery. In the process, by participating in the governing system of counties and prefectures the ruling power in the aboriginal community retained its position, albeit in a limited manner. Some communities were moved to the center of the county. Bujo Ye Gun (夫租薉君) is a case in point. The Late Han Emperor Gwangwu’s changing of its governance of frontiers affected Nangnang Commandery. Dongbudowie, the military unit responsible for seven regions in the Yongdong area, was removed. The Late Han lost its influence over the Yongdong area while Koguryo advanced, making it difficult for the Late Han to dispatch administrators. In late 140 CE, the Yongdong area was completely removed from the jurisdiction of Nangnang Commandery. After gaining control over East Okcho, Koguryo advanced south and ruled seven regions of the old Yongdong area by the Late Han period. In previous studies, the method by which Koguryo controlled East Okcho was considered to have been indirect control based upon tribute payment, which was Koguryo’s traditional method. However, after in-depth reviews of inscriptions, it has been found that Koguryo directly controlled East Okcho by dispatching regional officers. At the same time, Koguryo did not completely eliminate the ruling power in the aboriginal community and allowed them to participate in the governing system. This indicates that Koguryo embraced much of Han’s governing system. It is questionable whether the method by which Koguryo ruled East Okcho can be applied to the entire Yongdong area. This is because in the third century East Okcho and Bulnae Ye (不耐濊) clearly differed in their forms of governance. There was a gap of 100 years between the periods of subordination to Koguryo, thus there was a different governing system before their subordination. After the Later Han abandoned its rule over the Yongdong area, Bulnae Hu (不耐侯) gained control over Bulnae Ye and placed Bulnae Ye’s towns under its rule. Koguryo is considered to have accepted such a governing structure from that time. It is difficult to conclude that this can be seen as indirect control. However, it is clear that Koguryo gained a relatively high level of independence compared to East Okcho. East Okcho and Bulnae Ye showed different reactions to the Guanqiu Jian attack because of Koguryo’s ruling system and the differences in their respective subordination to Kogu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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