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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倭使의 宴享接待와 女樂

朝鮮前期倭使の宴享接待と女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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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조선전기에 많은 왜사가 조선에 도항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들에게 三浦宴과 路宴, 京中迎餞宴, 闕內宴, 禮曹宴, 名日宴 등의 연향접대를 실시하였으며, 접대비용도 조선정부가 모두 부담하였다. 또한 조선에서는 왜사를 4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연향의 횟수, 음식의 종류와 수량, 연향시의 座次, 연향의 주관자 등에서 차등을 두었다. 특히 조선전기에 왜사에게 실시한 연향접대는 그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본국왕사의 경우 그 횟수가 20회가 넘을 정도로 많았다. 조선에서는 건국초부터 내외연에서 여악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왜사의 연향접대에서도 여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악이 폐단이 나타나자 1433년부터 隣國使臣宴에서 남악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세종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이 소모되고 또 장성하면 재예를 쓸 수 없다는 남악의 폐단이 나타나면서 여악의 필요성이 계속해서 제기되자 1461년(세조 7)에 왜・야인의 路宴에서 여악을 쓰는 예에 따라 예조연에서도 여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는 한시적인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그 4년 후인 1465년에야 비로소 왜・야인의 연향시에 여악의 사용이 본격화되었다. 그 후 여악의 폐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지만, 오히려 연산군대에 들어와서는 여악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그 후 정치 일선에 등장한 조광조 등이 여악의 폐지를 요구하였으나 계속해서 여악이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519(중종 14)년에 서울의 여기는 내연을 위해서 그대로 두는 대신 외방의 여기를 혁파하고 남악을 설치하였다. 이 같이 외방에서 여악이 폐지되자 왜・야인이 연향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지방에서도 연향시에 많은 수의 가동・무동을 구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를 계기로 외방에 여악을 설치하자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으며, 일부에서는 明使가 올 때에 외방에서 임시로 여악을 사용하자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1520년 외방에 여악을 설치하고 正殿에서도 여악을 사용하였다. 그 후 왜사의 연향접대에서 여악의 사용은 명종・선조대까지 지속되었으나, 1591년(선조 24)에 일본국사를 접대할 때에 여악을 정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왜인의 연향접대에서 남악을 사용하다가 1612년에 차왜의 요청으로 삼포에서 다시 여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1705년에 외연에서 여악을 쓰지 않았으며, 이는 왜인접대에도 영향을 주어 1714년에는 삼포에서의 왜인접대에서도 남악을 사용하였다. 그 이후 왜인접대에서의 남악의 사용은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Abstract

朝鮮前期には多くの倭使が朝鮮に渡航した。朝鮮では彼らに三浦宴と路宴、京中迎餞宴、闕內宴、禮曹宴、名日宴などの宴享接待を施し、接待費用も朝鮮政府が全て負擔した。また、朝鮮では倭使を四等級に分け、等級によって宴享の回數、料理の種類と數量、宴享時の座次、宴享の主管者などで差をつけた。特に日本國王使の場合は、その回數が20回を越えるほど多かった。朝鮮では建國初から內外宴で女樂が用いられたため、倭使の宴享接待においても女樂が用いられた。しかし、女樂の弊端が現れると、1433年からは隣國使臣宴で男樂が用いられるようになり、これは世宗末まで續けられた。しかし、國家財政の消耗と、成人すると才藝が使用できなくなる男楽の弊端から、女樂の必要性は續けて主張された。そして、1461年(世祖7)には、倭・野人の路宴で女樂を使用する例に倣い、禮曹宴でも女樂が用いられるようになったが、これは一時的な措置に過ぎず、その4年後の1465年になってはじめて倭・野人の宴享時における女樂の使用が本格化された。その後、女樂廢止の論難は繼續したが、むしろ燕山君代に入ると女樂は一層盛んになった。趙光祖ら士林派が政治の第一線に登場すると、紊亂した風俗を正すために女樂の廢止が續けて主張されたが、女樂は續けて用いられた。1519(中宗14)年、ソウルの女妓を內宴のためにそのまま置く代わりに、外方の女妓を廢止して男樂が置かれた。このように外方で女樂が廢止されると、倭・野人らは宴享に參席しなくなり、地方でも宴享時に多くの歌童・舞童を準備できないなどの問題點が生じた。これを契機に、外方に女樂を設置しようという論議が再び起こり、一部では明使が来る際に外方で臨時に女樂を用いようという主張もあった。その結果、1520年に外方に女樂を置き、正殿においても再び女樂を用いることとした。その後、倭使の宴享接待における女樂の使用は明宗・宣祖代まで續けられ、壬辰倭亂直前の1591年(宣祖24)に渡航した日本國使を接待する際に停止された。壬辰倭亂以後、倭人の宴享接待では男樂が用いられたが、1612年に差倭の要請によって三浦で再び女樂が用いられた。しかし、1705年の外宴で女樂を用いなかったことが倭人接待にも影響を及ぼし、1714年の三浦での倭人接待では男樂が用いられた。その後、倭人接待における男樂の使用は朝鮮末まで維持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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