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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블을 통해서 본 近世 倭館」- 1836년, 南膺中(남응중)의 倭館 闌入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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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본 연구는 1836년 南膺中의 倭館을 통한 일본 망명 시도를 왜관 난입(潛入)이라는 범주에서 그 이전의 사건들과 비교․검토해 본 것이다. 검토 기준으로는, 첫째 조선인들이 왜관에 무단으로 난입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둘째 왜관에 무단으로 들어가 사고를 일으킨 경우 이들의 신병은 어떻게 취급되었는지, 셋째는 사건의 처리를 통해서 본 왜관의 위상이었다. 그 결과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19세기 중엽까지 竊盜와 관련된 왜관 난입 사례를 조사해 본 결과, 왜관이 경제적으로 풍요롭다는 인식은 어느 정도 보편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남응중 사건에서는 왜관을 재화가 있는 곳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비록 망명은 좌절되었지만, 왜관을 일본 중앙정부와 연결된 곳으로 인식하는 부분이 있었다. 왜관에 대해 형성된 여러 가지 인상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빈민이나 어린아이, 범죄인 등, 조선 사회의 약자들에 있어서 생계의 기회, 또는 도피처로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왜관에 난입하여 사고를 일으킨 경우, 조선인은 양국에서 정한 禁制에 따라 동래부로 넘겨져 조사를 받게 되는데, 대부분은 동래부사가 중앙에 올린 狀啓대로 처벌이 이루어졌다. 刑이 정해지면 사형의 경우에는 왜관 근처의 二嶽에서 처형이 이루어졌다. 처형 후에는 동래부 및 왜관 역인의 입회 하에 檢屍하는 것이 통상적인 절차였다. 그러나 조일 양국의 인식 차 및 교섭상의 사정 때문에 위 절차가 기계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왜관 난입과 관련된 범죄에서는 신병을 조선과 왜관의 어느 쪽에서 먼저 확보했느냐, 또는 조일 양측이 사안을 어떻게 인식했느냐에 따라 범죄의 경중과 상관없이 왜관 억류 기간이나 처벌 정도, 처리 기간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왜관은 이때 兩譯(訓導․別差) 경로를 거쳐 범죄인의 신병을 조선측에 인계하려 했는데, 양역은 문서 전달을 비롯하여 왜관측과의 모든 접촉 및 소통에 있어서 공적인 통로였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조일 간접통교에 있어서 왜관의 자세와 관련된 부분인데, 왜관은 범죄인의 취급에 있어서 실제로는 대마번의 지시를 받고 있으면서도 조선측에 대해서는 왜관이 되도록 대마번의 지시나 영향을 받는 곳이 아니라는 모양새를 취하도록 하였다. 햇수로 3년에 걸친 남응중 사건을 보면 대마번은 以酊庵을 견제하고 막부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조선 예조의 서한을 요구하는 한편, 體情使 파견이라는 新例를 개설하여 이익을 확대해가는 부분에서는 막부라는 배경을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모반죄인 남응중에 대해서는 왜관이 그를 비호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신병을 신속하게 넘겨버렸기 때문에 남응중의 신병 인수․인계 및 처형․검시 절차가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이는 범죄인의 인도 절차에 대한 왜관측의 취급을 조선이 대마번이나 막부의 대변기관으로서 행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될 경우 교섭상의 실익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서였는데, 왜관이 조선의 틀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실익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조일 간접통교 안에서의 19세기 왜관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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