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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기의 강화교섭과 加藤淸正 -조선왕자의 送還문제를 중심으로-

壬辰倭亂期の講和交涉と加藤淸正 -朝鮮王子の送還問題を中心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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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임진왜란은 7년 전쟁 기간 중 5년 1개월을 ‘휴전’ 상태에서 조선과 일본, 일본과 명 사이에서 강화교섭, 즉 외교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진행되어왔던 ‘일・명, 조・일강화교섭’가운데 특히 조선왕자 송환문제에 깊게 관여했던 기요마사의 활동을 중심으로(서생포 회담) 그가 조선과의 강화교섭에 등장하게 되는 배경, 동시에 왕자 송환문제가 이후 전쟁 중의 강화교섭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일본이 조선을 재침한 배경과 ‘조선 왕자의 일본 不參’이 어떠한 관련을 갖고 있는지 고찰하였다. 그 결과 일본 측은 1593년 평양성・벽제관 전투의 패전으로 무기와 병량부족이 극심하여 明 정복보다 충청도과 전라도 지역에서 병량미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경상도 해안지역에 축성을 해야 했다. 이처럼 조선의 남부지역에 거점을 두고서 조선을 攻略해야 하는 전략으로 변경됨에 따라 히데요시는 명이 요구하는 화의조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한성 철수와 조선 왕자의 송환은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 조선왕자의 송환문제는 明측의 끊임없는 재촉과 戰況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결단과, 히데요시(秀吉)의 전략변화에 의해 해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지금까지 총동원해서 감행해 왔던 침략전쟁이 수포로 돌아가고, 국내의 정세마저도 불안한 가운데 히데요시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다른 돌파구로서 재침략을 감행하였다. 그는 일본의 승리와 자기의 관대함을 국내에 선전하기 위해서 다시 재침을 결심한 것이고, 조선을 공격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전쟁 발발의 원인을 조선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자가 일본에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조선왕자가 來日하지 않았다던가, 조선통신사가 늦게 도착했다던가, 신분이 낮은 관리들이 왔다던가 하는 명분을 내세워서 전쟁을 다시 개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재침략의 배경으로 논의되어 왔던 ‘히데요시의 일본국왕 임명 거부설’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Abstract

壬辰倭亂は7年間の戦争の中, 5年1ヶ月を ‘休戦’ 状態で朝鮮を日本,日本と明との間で講和交渉,つまり外交戦が長く続けていた. 本論文では今まで一般的に進行してきた ‘日・明, 朝・日講和交涉’のうち, 特に朝鮮王子の送還問題に深く関わっていた加藤清正の活躍を中心に(西生浦會談), 彼が朝鮮との講和交涉に登場する背景, 同時に王子の送還問題が以後戰爭中の講和交涉にどのような影響を与えたのか, 日本が朝鮮を再侵した背景と ‘朝鮮王子の日本不參’がどのような関連があるのかについて考察した. その結果, 日本側は1593年 平壤城・碧蹄の戦いの敗戦で武器と兵糧不足が深刻となり, 明征服より忠淸道と全羅道地域で兵糧米を確保することが急先務となった. このため慶尙道の海岸地域に築城する必要があったのである. このように朝鮮の南み地域に據點をおき朝鮮を經略せざるをえない戰略と變更されるにつれ、秀吉は明が要求する和議條件に応じ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ある. 日本軍の漢城撤收と朝鮮王子の返還はこのような状況で起きたのである. 結局、 朝鮮王子の送還問題は明側の絶え間ない催促と戰況が不利であると判断した小西行長と石田三成の決断, そして秀吉の戦略變化により解決されたものであると言える. 一方, 今まで總動員して敢行して来た侵略戰爭が水の泡となり, 國內の情勢さえも不安した際, 秀吉は政權を維持するため、また別の突破口として再侵略を敢行した. 彼は日本の勝利と自分の寬大さを国内に宣伝するため再侵を決心したことであり, 朝鮮を攻撃対象としたため, 戰爭勃發の原因を朝鮮側に回せざるを得なかったのである。したがって朝鮮王子が日本へ来ないことを知りながらも 朝鮮王子が來日しなかったとか, 朝鮮通信使が遅くなって着いたとか, 身分の低い官吏が往来したという名目を立てて再び戦争を開始したのである. したがって今まで再侵略の背景として論議されてきた‘秀吉の日本國王任命の拒否說’は再檢討すべき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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