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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 전반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동향 - 戰功의 위기와 講和交涉으로의 가능성

A Study on the Movements of Kato Kiyomasa in the Early Days of Imjin War ― A crisis in military merits and the possibility of peace negoti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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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壬辰戰爭(1592~1598) 당시, 두 번째 군단에 속하여 조선을 침략한 일본장수이다. 그는 전투와 강화교섭을 비롯한 전쟁의 전체 국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는 대개 ‘호전적’이며, ‘講和交涉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반대한’ 인물로서만 평가되었고 그의 행동은 대개 이와 같은 단순한 성격규정 위에 해석되었다. 임진전쟁을 다룬 많은 연구가 시간흐름에 따른 전투 양상 분석이라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전쟁의 전체 시공간 속에서의 그의 행동을 분석하기 위해 ‘戰功에 대한 위기’와 ‘강화교섭’이라는 틀을 사용하였고, 이를통해 대안적인 서술을 시도해 보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항상 전쟁 국면을 리드하여 독자적인 전공을 올리고자 했다. 함경도지역에 진입한 후 북진을 계속한 이유는 조선왕을 생포하고 明으로의 경로를찾기 위해서였으며, 회령까지 북진하여 왕자일행을 생포한 후 여진지역을 침입하였던 이유도 남들보다 뛰어난 전공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전투뿐 아니라 ‘병량축적’, ‘백성환주’ 등과 같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성공적인 이행하고 있다는점을 전공으로서 과시했다. 그러나 곧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병량과 병력의 문제, 조선인들의 저항 등을 겪으며 전쟁수행의 기본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기요마사가 입은 손실은 산술적으로도평양에서 진군을 멈춘 이들보다 많았으며, 전공에 대해 더 높은 욕구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가 입은 자존심의 상처는 더 컸다. 따라서 그는 전쟁속행을 주장할입장이 결코 아니었으나, 경쟁자들이 먼저 추진하고 있던 강화교섭에 참여할 의사역시 없었다. 경쟁자들이 강화교섭을 추진하기 위한 도구로서 기요마사의 유일한 전공이었던 왕자를 송환하게 되자, 그러한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는 기존의 강화노선을 거부한 채 진주성 전투에 전력을 투여하여 전공을 인정받으려 했으나,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당면 상황에서 전공을 올릴 수 있는 방법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의’를 명분으로 삼은 자신만의 강화교섭을 시작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전쟁 국면을 리드하고, 남들보다 뛰어난 전공을 얻기 위해 다양한 궁리를 한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Abstract

Kato Kiyomasa(加藤淸正) was a Japanese general in the 2nd Corps that invaded Joseon during the Imjin War(壬辰戰爭: 1592~1598). Upon landing Joseon, he started the most vehement acts of invasion. He even moved up to Hamgyeong Province(咸鏡道) and captured the party of a Joseon prince. In later days of the war, he exerted huge influences on every aspect of the war including battles and peace negotiations. However, he has been considered only as a Japanese commander who was "warlike" and consistently opposed "peace negotiations" both in Korea and Japan. His actions have been interpreted based on such a simple character description as many of the studies on Imjin War focused on the analysis of battle patterns over time. This study adopted a framework of "military merits" and "peace negotiations" and made an attempt for alternative narration to analyze his actions in the overall context of time and space throughout the war, not being lost in character analysis. He was determined to lead the war in many aspects and achieve his own military merits all the time. He continued his march north even after reaching Hamgyeong Province because he wanted to capture the Joseon king and explore a route to Ming Dynasty. He also made his way into Yeojin(女眞) after capturing the party of a Joseon prince in Hoeryeong(會寧) because he was obsessed with achieving more remarkable military merits than others. It was through his military merits that he demonstrated that he was successfully implementing the orders of Toyotomi Hideyoshi(豊臣秀吉) such as "lay up provisions" and "bring Joseon people back(to live)" in addition to battles. He, however, was soon faced with a crisis. In fact, he was one of the Japanese generals that felt a crisis in an earlier and more urgent way than others. He was put in a basic crisis in a war operation, having problems with provisions and military strength and facing resistance from common people. As a matter of fact, the loss he caused outnumbered the loss caused by those who stopped their march in Pyeongyang(平壤). The damage to his pride was unbearable since he had the most desire for and pride in his military merits. Even though he was not in a position to insist on a quick operation, he had no intention to join his rivals, who were working on peace negotiations. His determination became even stronger when the Joseon prince, who was his only military merit, was sent back by his rivals as a means of promoting peace negotiations. Refusing all the peace efforts, he devoted all the military power under his supervision to the Jinju Fortress(晉州城) battle and tried to have his military merits recognized, only to fail to achieve satisfying results. He then fell into despair for a while. In the end,he began his own peace negotiations under the name of "Hideyoshi's true intention" as a way to achieve a military merit in his situation. He was a "three-dimensional" character who engaged in various deliberations to lead the war in many aspects consistently and achieve more outstanding military merits than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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