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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城의 高句麗國 再檢討

The review of Goguryeo in the Han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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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안승과 검모잠 등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에 관한 사료는 비교적 풍부한 편이나사건의 시기가 불분명하고 사료 간에 내용이 상충하여 연구자마다 견해를 달리한다. 이 글에서는 중국 사료들 간의 내용 비교, 『신당서』 동이열전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비교, 고구려본기의 구조 분석, 『일본서기』에 보이는 고려사를 통해 한성의 고구려국의 성립과 나당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규명하였다. 670년 6월 이후 안승이 한성 고구려국의 왕으로 즉위하여 5부와 관등을 정비하였고, 평양 이남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671년 9월 신라군과 연합하여 당군을 침입을 물리쳤고 이듬해인 672년부터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다. 양측은석문 전투 이후 4개월간 백수산 전선을 유지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소개된 봉산 고당성의 지명이 이때에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러한 대치과정 중 672년 8월 이후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내분과 기근 등으로 673년 윤5월에는 호로하까지 밀리게 된다. 안승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왜에 사신을 파견하려고 하지만 당군이 황해를봉쇄한 까닭에 신라 송사의 도움으로 왜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로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모두 신라로 내투하게되었다. 하지만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닸다는 기존의 이해와 달리 안승은 마지막까지 고구려인들과 함께하였고, 이러한 신뢰가 있었기에 신라 내투이후에도 보덕국에서 안승을 중심으로 결속할 수 있었다.

Abstract

Between June and July of 670, Geommojam, a refugee of Goguryeo,re-established Goguryeo by crowning Anseung, a scion of the royalfamily of Goguryeo, as king in Hanseong, or Jaeryeong in today’sHwanghae Province. In alliance with Silla, Hanseong Goguryeo tookmost of the Hwanghae Province area and acquired an internationalstature by dispatching envoys to Japan. The war between the Goguryeo-Silla combined forces and the TangEmpire lasted from September of 671 to May of 673. Even though thecombined forces were defeated by the Tang army and retreated to theImjin River, Anseung did not stop trying to overcome the crisis and sentenvoys to Japan. However, in the end, he could not achieve his goal andhad to take refuge in Silla with the revived army of Goguryeo. Anseung devoted himself to the reconstruction of Goguryeo andfought with his army to the last moment. Bodeokguk could beestablished in Silla territory because the excellent abilities of Anseungand the Goguryeo people were essential to Silla for the war against theTang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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