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의 ‘갱위강국(更爲强國)’ 표문과 영동대장군
Biǎowén(表文) Related to “Becoming a Strong Country Again(更爲强國)” in King Muryeong’s Period and “Great General Yeongdong(寧東大將軍)”
0
조회
0
다운로드
2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양서』 백제전에 수록된 ‘갱위강국(更爲强國)’ 표문은 단편적인 문장만 전하지만, 강국으로서의 백제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간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다만 ‘累破句驪 今始與通好’ 부분의 통호 상대국이 양인지 고구려인지, 그리고 ‘而百濟更爲强國’ 부분을 표문 문장으로 볼 수 있는지 등에 관한 상반된 입장이 제기되어왔다. 그런데 기존에는 표문이 군신관계와 관련되는 문서라는 점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표문을 검토한 결과 통호 상대국은 고구려이며, ‘而百濟更爲强國’은 표문에 서술된 내용을 「양직공도」 내지 『양서』 찬자가 각색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았다. 표문의 문장, 즉 ‘累破句驪 今始與通好’는 백제가 고구려를 격파했지만 결국 통호하여 동방 지역에 안정을 가져왔음을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표문은 「양직공도」 ‘방소국(旁小國)’ 기사의 내용도 포함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표문의 내용은 무령왕 즉위 이후 백제의 중흥과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한 것이었다. 동성왕대까지를 고구려에 의해 쇠락한 시기로 전제하고, 무령왕 즉위 이후를 ‘累破句驪 今始與通好’를 달성하고 방소국 위에 군림 하는 중흥의 시기로 서술한 것이다. 표문이 양을 의식한 문서임을 고려한다면, 백제가 양 중심 국제질서 속에서 동방의 최대 강국으로 자리매김하여 지역질서에 안정을 가져왔음을 주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표문을 접한 양 무제는 무령왕에게 고구려와 동일한 장군호, 영동장군(寧東將軍)를 중복 수여하되 대장군으로 높여주었다. 이는 백제왕이 역사상 처음 고구려왕보다 높은 등급의 장군호를 받은 사례이다. 특히 양 무제가 520년 고구려왕에게 영동장군을 수여했음에도 이듬해 무령왕에게 동일한 장군호를 주고, 나아가 대장군으로 높인 사실은 표문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표문 속 고구려를 압도한 동방의 강국 백제의 면모와 이를 통한 성과가 일치하는 것이다. 영동대장군으로 대변되는 성과는 표문을 통한 무령왕의 강국 선전이 효과를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무령왕은 ‘영동대장군·백제왕’의 위상을 대내외에 선전할 수 있었다.
Abstract
In this paper, 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Baekje and Liáng(梁) in the reign of King Mu-reyong(武寧王) are examined centering on biǎowén written in 521. In 512, King Mu-reyong asked Liáng for advanced culture and human resources to improve the national system, and in 521 asked Liáng for Chinese novel titles to show off the achievements of various domestic and foreign policies he had pursued since winning the throne. King Mu-reyong requested Liáng for his Chinese novel titles with the aim of using the authority of Liáng, which was at its peak at the time, to raise Baekje’s international status. The biǎowén sent to Liáng in 521 was a statement of Baekje’s prosperity and status as a powerful country during the King Mu-ryong period. The biǎowén stated that the period before King Mu-ryong’s accession to the throne was a period of decline due to Goguryeo’s invasion, and that the period after that was a period of power by defeating Goguryeo. The most important argument in the biǎowén is that Baekje defeated Goguryeo and eventually became the largest eastern power in the world centered on Liáng. These claims were somewhat exaggerated, but based on internal and external achievements actually achieved in the reign of King Mu-reyong. In the end, King Mu-ryong was unusually awarded “Great General Tranquilizing the East(寧東大將軍)” from Liáng, which is a higher grade than the Goguryeo king, and was able to advertise it both internationally and internationally. This “Great General Tranquilizing the East” was the result of Liáng’s recognition of Baekje as the largest eastern power as described in the biǎowén.
참고문헌 (56)
- "宋書", ~
- "南齊書", ~
- "梁書", ~
- "魏書", ~
- "隋書", ~
- "舊唐書", ~
- "三國史記", ~
- "日本書紀", ~
- "禮記", ~
- "攻媿集", ~
- "梁職貢圖", ~
- "武寧王誌石", ~
- 金鍾完, "中國南北朝史硏究" (1995), 一潮閣
- 노중국,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2012), 지식산업사
- 미야자키 이치사다, "구품관인법의 연구" (2002), 소나무
- 成周鐸, "百濟의 思想과 文化" (2002), 서경문화사
- 이도학, "백제 한성·웅진성 시대 연구" (2010), 일지사
- 榎一, "榎一雄著作集" (1992), 汲古書院
- 坂元義種, "百濟史の硏究" (1978), 塙書房
- 坂元義種,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 (1978), 吉川弘文館
- 길기태, "武寧王의 ‘更爲强國’ 선언과 大通寺", 한국고대사탐구, (34), pp.279~314 (2020), 한국고대사탐구학회[DOI]
- 김기섭, "백제 東城王 암살사건 재검토", 한국학논총, 34, pp.113~129 (2010), 한국학연구소
- 김수태, "5세기 후반 백제의 대왜 관계와 남조", 백제학보, (6), pp.169~193 (2011), 백제학회
- 盧重國, "百濟 武寧王代의 集權力 强化와 經濟基盤의 擴大", 百濟文化, 21 (1991)
- 노중국, "무령왕대 백제의 동아시아 상에서의 위상", 백제문화, 1(46), pp.5~32 (2012), 백제문화연구소[DOI]
- 박민경, "5세기 후반 백제의 대왜관계 ― 蓋鹵王ㆍ東城王代를 중심으로 ―", 사림, (60), pp.125~154 (2017), 수선사학회[DOI]
- 박윤선, "백제와 송·제·양 교섭기사에 대한 고찰", 역사문화연구, (31), pp.3~32 (2008), 역사문화연구소
- 박찬우, "漢城期 백제의 將軍號 활용 배경과 정치적 의미", 백제문화, 1(52), pp.91~123 (2015), 백제문화연구소[DOI]
- 朴漢濟, "南北朝時代의 南北關係-交易과 交聘을 中心으로-", 한국학논총, 4 (1981)
- 박현숙, "백제와 섬진강" (2008), 서경문화사
- 徐甫京, "5세기 말~6세기 초 한반도 諸國과 倭國의 관계", 先史와 古代, 18 (2003)
- 서보경, "5세기의 高句麗와 倭國 -宋書 倭國傳의 倭武王 上表文에 나타난 '고구려 정토' 문제를 중심으로-", 백제연구, (43), pp.1~23 (2006), 백제연구소
- 梁起錫, "百濟 專制王權 成立過程 연구", 박사, 사학, pp.1990
- 梁起錫, "百濟 武寧王代의 自尊的 天下觀", 중원문화연구, 16 (2011)
- 양진성, "南北朝時期의 國際關係에 대한 再考 ― 國書의 授受事例를 중심으로 ―", 동양사학연구, (141), pp.57~91 (2017), 동양사학회[DOI]
- 양진성, "남북조시대 남북 간의 교섭과 남북관계― 대외교섭에 사용된 문서의 수수사례를 중심으로 ―", 중국고중세사연구, (46), pp.259~310 (2017), 중국고중세사학회[DOI]
- 위가야, "백제 무령왕대 ‘更爲强國’설의 재검토", 한국고대사연구, (95), pp.75~104 (2019), 한국고대사학회[DOI]
- 윤용구, "현존 「梁職貢圖」 百濟國記 三例", 백제문화, 1(46), pp.241~268 (2012), 백제문화연구소[DOI]
- 이기천, "7世紀初 唐의 對外戰爭 名分과 國際秩序", 중국고중세사연구, (39), pp.197~235 (2016), 중국고중세사학회[DOI]
- 李鎔賢, "『梁職貢圖』百濟國使條の「旁小國」",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7 (1999)
- 李在碩, "『宋書』 倭國傳에 보이는 倭王(武) 上表文에 대한 검토", 신라문화, (24), pp.67~90 (2004), 신라문화연구소
- 이정빈, "고구려-당 관계의 성립과 변경지대(618~624)", 고구려발해연구, 54, pp.59~85 (2016), 고구려발해학회
- 이주현, "魏晉南朝의 將軍制와 ‘寧東大將軍’", 백제문화, 1(46), pp.183~204 (2012), 백제문화연구소[DOI]
- 李弘稙, "六十周年 紀念論文集" (1965), 高麗大學校
- 田中俊明, "百濟の對梁外交-特に512年の遣使を中心に-", 충청학과 충청문화, 7 (2008),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 정동준, "6세기 동아시아에서의 책봉호의 정치적 의미 — 국제정세의 변동과 백제의 책봉호에 반영된 인식을 중심으로 —", 사림, (66), pp.1~26 (2018), 수선사학회[DOI]
- 이노우에나오키, "570年代の高句麗の対倭外交と高句麗·北斉関係 - 新出『裴遺業墓誌』の検討を中心に -", 고구려발해연구, 45, pp.111~176 (2013), 고구려발해학회
- 鄭載潤, "東城王 23年 政變과 武寧王의 執權", 韓國史硏究, 99-100 (1997)
- 鄭載潤, "熊津時代 百濟 政治史의 展開와 그 特性", 博士, pp.1999
- 鄭載潤, "백제와 섬진강" (2008), 서경문화사
- 정재윤, "무령왕대 대외관 –영동대장군 작호를 중심으로", 백제문화, (66), pp.31~56 (2022), 백제문화연구소[DOI]
- 한영화, "무령왕릉 출토 誌石의 성격과 諡號 문제", 역사와 담론, 100 (2012)
- 榎一, "梁職貢圖について", 東方學, 26 (1963)
- 近藤浩一, "6世紀百濟の思想的基盤と天下觀の形成", 京都産業大學日本文化硏究所紀要, 19 (2014)
- 田中俊明, "百濟武寧王をめぐるいくつかの問題", 朝鮮史硏究會論文集, 59 (2021)
- 趙燦鵬, "南朝梁元帝《職貢圖》題記佚文的新發見", 文史, (1)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