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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威德王・武王代 對高句麗 견제의 외교적 함의

The Diplomatic Implications of the Threat to Koguryo(高句麗) posed by King Mu(武王) and King Wideok(威德王) of Baekje(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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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갈등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두 나라의 전면적인 대립은 4~5세기의 절정기를 지나 6세기에 들어와서도 지속되었다. 553년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부터는 이러한 양국의 관계에 변화가 동반되는 듯 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그토록 얻고자 했던 한강유역이 신라로 넘어가게 된 상황에서 서로 간의 대립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백제와 고구려는 7세기 전반까지도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598년과 607년 백제 위덕왕과 무왕은 각각 隋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고구려 역시 즉각적인 보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백제와 대립각을 세웠다. 또한 626년에는 백제가 唐에게 고구려의 조공로 방해를 하소연하면서 중재를 요청하는 등 두 나라의 관계가 대립적이었던 것으로 사료에 나타난다. 기존연구에서는 백제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고구려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던 것으로 인식했다. 그렇지만 당시에 보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대립은 세력균형이라는 국제관계의 속성에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백제와 고구려가 얻고자 하는 목표를 신라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국 간의 전쟁은 고구려-신라, 백제-신라 사이에서 발생되고 있었다. 이러한 의문점에 착안하여 위덕왕과 무왕의 對隋外交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그것은 2단계의 과정을 거쳐 추진된 사행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는 1차 사행을 통해 고구려와 隋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음을 확인했고 이후 2차 사행을 통해 고구려에 대한 견제의사를 隋에 피력했던 것이다. 즉, 애초부터 고구려 견제를 목표로 한 사행이 아니라 통상적인 외교의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후속조치 차원에서 추진된 외교였다. 그러다보니 위덕왕의 경우에는 고구려-隋 전쟁이 끝난 시점에 고구려 정벌의 軍導가 되기를 청하는 등 중대한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백제가 본래 의도했던 목적은 隋와의 관계 개선이었다. 위덕왕의 경우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뒤쳐진 국가적 위상, 隋로부터 조공을 거절당하는 등의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무왕은 아막성 전투의 참패, 가뭄과 기근 등 대내외적 악재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때에 隋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인다는 소식을 접하자 백제는 고구려 정벌에 동참한다는 외교적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隋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이것이 사료에서는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견제로 비춰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덕왕과 무왕의 대고구려 견제는 고구려에 대한 직접적인 견제였다기보다는 대수관계의 개선을 목적으로 한 외교전술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598년과 607년 백제 대수외교의 외교적 함의를 도출할 수 있다.

Abstract

Since the 4th century, Baekje and Koguryo have come into conflict against each other because of the hegemony of the Hangang River(漢江) basin. After Silla(新羅) occupied the Hangang River Basin, relations between Baekje and Koguryo were expected to change. As both countries did not share common border any more, they seemed to change their main enemy to Silla. By the way, contrary to general expectation Baekje and Koguryo continued to fight until the first half of the 7th century. King Wideok(威德王) and King Mu(武王) tried to hold Koguryo in check in 598 and 607 each. Previous studies accepted that Baekje needed to hold Koguryo in check to attack Silla effectively. However, the conflict between Baekje and Koguryo does not correspond with the nature of balanced power. Since Silla controlled the Hangang River basin that Koguryo and Baekje wanted so much, the two countries had to consider Silla as the target of the attack. Actually most of the combat occurred between Baekje and Silla or Koguryo and Silla. There was no practical benefit that Baekje and Koguryo could be gained by keeping each other in check. On analyzing the dispatch of envoys of Baekje toward Sui dynasty, I could find out that it had been carried out as two-step process. Firstly, Baekje sent an ordinary envoy to Sui dynasty and got the information that Sui dynasty try to attack to Koguryo. On the basis of this information, Baekje dispatched special envoy who ask for attack to Koguryo to Sui dynasty. If Baekje had tried to threaten Koguryo from the start, it would have expressed its intention long before the war ended. But Baekje suggested their willingness to participate in the war between Sui dynasty and Koguryo after the end of the war. This was the result of a lack of willingness and information of war situation. The main purpose Baekje intended was not the check to Koguryo but promoting friendship with Sui dynasty(隋). Around 7th century, as Baekje was diplomatically isolated, a breakthrough to resolve a crisis was needed. So Baekje took advantage of an opportunity of conflict between Sui dynasty and Koguryo. This very thing was expressed as a check against Kogu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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