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기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
A Study on the Relationships between Baekje and Goguryeo in the 4th and 5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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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고는 4~5세기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과 전개 양상, 그리고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두 나라는 영역 확대에 따른 충돌에서 비롯되어 중국 군현이 가진 물적·인적 자원의 확보와 교역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한반도의 대표성을 갖는 문제와도 직결되며, 전쟁이 점차 국제적인 양상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중국 군현이 축출되자 이곳으로 진출하면서 한반도의 자웅을 겨루었다. 처음의 충돌은 백제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는 백제가 대비를 철저히 한 반면 고구려는 前燕과의 항쟁에서 국가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점차 북상을 하면서 帶方의 물적·인적 자원을 흡수하고, 중국 군현을 대신하여 교역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백제 근초고왕은 東晋으로부터 ‘領樂浪太守’라는 작을 받았다. 이는 백제가 이 무렵 국제사회에서 한반도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인식되었을 만큼 성장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關彌城과 石峴城을 빼앗는 등 帶方界로 통하는 요로를 장악하였다. 대외관계에서도 신라를 끌어 들여 백제를 압박하였다. 아신왕은 광개토왕에게 굴복하였지만 왜를 끌어들여 이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에 백제와 왜는 연합하여 대방계를 공격하여 빼앗긴 교역로를 재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두 나라는 50여 년 동안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이는 백제의 정권 교체와 고구려의 평양 천도라는 내부적인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제 개로왕이 즉위하자 상황은 변화되었다. 이제까지 유화정책을 펼쳤던 해씨 세력이 실각하고, 친정체제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개로왕은 신라와 가야, 왜뿐만 아니라 북위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함으로써 대고구려 포위 전략을 주도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고구려는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 정권을 와해시킴으로써 두 나라의 기나긴 충돌은 일단락되었다. 한성 전투는 백제와 고구려의 대결이 국제전으로 확대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이는 두 나라가 필요에 의해 주변국을 끌어들인 결과이다. 또한 고구려는 중국 군현 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면서 이제 그 세력 범위를 한강 유역에까지 뻗치고자 하였다. 한강 유역이 삼국 간 주요 전쟁터로 부상한 것이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changes and meanings of wars and developments between Baekje and Goguryeo in the 4th and 5th century. As a result, the study found that the two kingdoms started battles over leadership by trying to absorb Chinese kuns and hyeons driven out of the Korean Peninsula, gradually turning their affairs into international ones. Once Chinese kuns and hyeons were driven out of the peninsula, Baekje and Goguryeo advanced into their areas and contended for supremacy over the peninsula. It was Baekje that won the first battle. After defeating Goguryeo, Baekje gradually marched northward, absorbed the physical and human resources of Daebang(帶方), and tried to supervise the trade route in place of Chinese kuns and hyeons. King Geunchogo of Baekje earned the title of “Yeongakrangtaesu(領樂浪太守)” from Eastern Chin, which signifies that Baekje was considered as the power to represent the Korean Peninsula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ose days. Upon coming to the throne, King Gwanggaeto of Goguryeo, however, took back Fortress Gwanmi(關彌城) and Seokhyeon(石峴城) from Baekje and dominated the main routes to the Daebang region. He also imposed pressure on Baekje by introducing Shilla in their diplomatic relationships. King Ashin succumbed to him but tried to effect a breakthrough by introducing Japan in the equation. Baekje made an alliance with Japan and tried to take the trade routes back by attacking the Daebang region only to fail. After that, the two kingdoms maintained a lull state for about 50 years. However, situations started to turn when King Gaero of Baekje came to the throne. He took an initiative in implementing the strategy of encircling Goguryeo by inviting Northern Wei as well as Shilla, Gaya, and Japan to invade it. Stimulated by his attempt, Goguryeo attacked Hanseong and brought the regime of King Gaero down. As a result, the long clashes between the two countries finally came to an end. The Hanseong Battle is significant in that it indicated that a confrontation between Baekje and Goguryeo could evolve into a global war, which was the result of the two countries’ efforts to involve their surrounding countries in the matter for their need. Goguryeo completed its mission to rule Chinese kuns and hyeons and tried to expand its scope to the Han River, which made the Han River areas emerge as a new major battleground for the three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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