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초 삼국의 정세와 당항성 전투 의의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ree kingdoms and the significance of Danghang-fortress battle in the early 7th C
0
조회
0
다운로드
17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당항성은 신라 진흥왕대 한강 유역을 점령한 이후 대중국 외교의 거점으로 국운을 걸고 사수해야만 했던 곳이다. 반면, 백제나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는데 있어 수나 당의 간섭이 부담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당항성을 봉쇄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은 마침내 신라 정벌을 위해 40여 성과 대야성 함락을 일거에 이루게 되며, 동시에 당항성을 고구려와 함께 공격하였다. 당항성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대야성을 함락하여 신라 왕도를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당으로 사신을 보내지 못하도록 봉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단독으로 당항성을 공격하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에 청병을 하게 되고, 고구려는 낭비성과 칠중성 전투의 보복 차원에서 전투에 응하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는 빠른 시일 내에 당항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육군보다는 수군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덕적도와 당항성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결과, 백제와 고구려군은 조수간만의 차이와 지리적인 여건 등을 극복하지 못하여 당항성을 함락하는데 실패하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한 것을 탐지하였고, 이를 당에 알려 청병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당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해 나가게 된다. 당항성 전투는 이제까지 대야성 전투에 가려져 백제와 고구려, 신라사이에 벌어진 일회성 국지전으로 여겨져 온 경향이 있지만, 백제의 치밀한 계획하에 벌어진 전투였다. 비록 이 전투에서 백제와 고구려군이 당항성을 봉쇄하지 못하였지만, 신라와 당사이의 외교관계를 단절시키고자 시도했던 목적이 뚜렷한 전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백제가 신라를 공략하는 전술을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전개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될 필요가 있다.
Abstract
As Danghang-fortress was the key position of diplomacy to China after the occupation of Han-river basin during the period of King Jinheung of Shilla, it was the place which must defend staking the national destiny. Whereas, Backje and Gogurye had to block up the point because they bore the burden of Su or Dang’s Dynasty interference when they attacked Shilla. Finally in 642, Backje's King Uija captured approximately the 40 castles and Daeya-fortress. At the same time it attacked the Danghang-fortress with Gogurye. The reason why Danghang-fortress became a target was to obtain the bridehead for attacking the royal road through attacking Daeya-fortress. it also meant that they couldn’t send a envoy to Dang. But Backje hadn’t been enough strong if for attacking Danghang-fortress lonely. So it asked Gogurye to send the troops. As for the request of military support from Backje, Gogurye accepted that because it retaliated against Shilla for the defeat of Nangby-fortress and Chiljung-fortress battle in the past. In oder to attack Danghang-fortress quickly Gogurye and Backje might use the naval forces than the army. There supposed to be intensive battle between Deuckjeck-island and Danghang-fortress. As the result of the battle, Backje and Gogurye failed to gain secure Danghang-fortress because they could not overcome the difference between the rise and fall of the tide and the geographical conditions. Through this battle, Shilla came to know(identified) the reality of Gogurye and Backje’s alliance and Shilla could inform the fact to Dan and it developed their favorable relations with Dang. So they requested Dang to send out the military forces. Even though Danghang-fortress battle had been considered a kind of one-time regional war thus far, in fact, it occurred under Backje’s deliberate plan. Although this battle couldn’t be blocked Danghang-fortress by Backje and Gogurye, this it is significant that the aim of conducting of the battle was to break 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Shilla and Dang. Also we need t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Backje used different tactics when he attacked Shilla compared to the battle in the past.
참고문헌 (38)
- 唐城-1次發掘調査報告書, "漢陽大學校博物館", ~ (1998)
- 唐城-2次發掘調査報告書, "漢陽大學校博物館", ~ (2001)
- 경기문화재단, "당성" (2009)
- 李俊善, "新羅黨項城의 歷史地理的考察", 關大論文集, 8(1) (1980), 관동대학교
- 이기봉, "전통시대 남양도호부의 중심지와 역사적 변화", 地理學論叢, (45), pp.419~ (2005), 서울大學校社會科學大學地理學科
- 정재윤, "5~6세기 백제의 南朝 중심 외교정책과 그 의미", 백제문화, 2(41), pp.173~198 (2009), 백제문화연구소
- 신형식,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이해", pp.219~ (2009), 주류성출판사
- 신형식,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pp.215~ (1997)
- 김창석,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百濟ㆍ新羅의 전쟁과 大耶城", 신라문화, 34(34), pp.77~104 (2009), 신라문화연구소
- 문안식, "의자왕 전반기의 신라 공격과 영토확장", 慶州史學, (23), pp.8~ (2004), 慶州史學會
- 황보경, "603년 北漢山城 전투 고찰", 韓國史學報, (58), pp.33~64 (2015), 고려사학회
- 정원주, "榮留王의 對外政策과 政局運營", 고구려발해연구, 40, pp.9~43 (2011), 고구려발해학회
- 방용철, "高句麗 榮留王代의 정치 동향과 對唐 관계", 대구사학, 102, pp.35~60 (2011), 대구사학회
- "6·7세기 高句麗政治勢力의 동향", 韓國古代史硏究, 5, pp.41~43 (1992), 韓國古代史學會
- 허중권, "602년 阿莫城 戰鬪의 전개과정에 대한 고찰", 군사, (85), pp.29~60 (2012),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 皇甫慶, "新州位置에 대한 硏究", 白山學報, (53), pp.228~229 (1999), 白山學會
- 서영일,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pp.128~ (1999), 학연문화사
- 金光鉉, "德積島史" (1985), 德積島史編纂委員會
- 덕적군도종합학술조사, "인천광역시립박물관", ~ (2002)
- 인천 옹진군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 보고서, "문화재청", 400~ (2014)
- 權悳永, "三國史記의 原典檢討", pp.82~83 (1995), 韓國精神文化硏究院
- 최근식, "신라해양사 연구", pp.117~ (2005), 고려대학교출판부
- 申瀅植, "韓國古代의 서해 교섭사", 국사관논총, (2), pp.258~ (1989)
- 정진술, "한국해양사", pp.165~ (2009), 京仁文化社
- 화성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2006)
- 金元龍, "華城郡麻道面白谷里百濟古墳과 土器類", 百濟硏究, 2 (1971), 忠南大學校百濟硏究所
- 三國時代 遺蹟의 調査硏究(Ⅱ) 華城白谷里古墳, "韓國精神文化硏究院", ~ (1994)
- 徐榮一, "高句麗娘臂城考", 史學志, 28 (1995), 檀國大史學會
- 박종서, "고구려 낭비성娘臂城 위치에 대한 검토", 국학연구, (17), pp.109~152 (2010), 한국국학진흥원
- 김영관, "660년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에 대한 고찰", 신라사학보, (20), pp.93~152 (2010), 신라사학회
- 평택 서부 관방산성 시·발굴조사 보고서,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 (2004)
- 고희종, "한반도 주변 해역 5개 정점에서 파랑과 바람의 관계", 한국지구과학회지, 26(3), pp.240~252 (2005), 한국지구과학회
- 김대문, "대역 화랑세기", pp.290~291 (2005), 소나무
- 德積群島의 考古學的 調査硏究, "서울大學校 博物館", 58~ (1999)
- 朱甫暾, "《文館詞林》에 보이는 韓國古代史 관련 外交文書", 慶北史學, (15), pp.164~166 (1992), 慶北史學會
- "舊唐書", ~
- "三國史記", ~
- "文館詞林",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