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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梁客舍 造營에 관한 硏究

A Study on the Construction of Choryang-gae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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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草梁客舍는 1678년 창건 이래 총 9회 이상의 중수공사가 행해졌다. 객사가 여러 번 중창되면서 間架의 수도 늘어났는데, 정청 및 동・서헌 주요건물은 24칸에서 33칸 정도의 규모를 거쳐 45칸의 규모까지 증축되었다. 주요 건물과 함께 외삼문과 내삼문 등 부속 건물이 증축되었으며, 객사 주변의 담장 및 축대를 포함한 정비공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왜관접수가 일어난 다음해인 1873년에도 초량객사의 중수가 이루어진 사실을 통해 초량객사의 건축물은 초량왜관이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변모해 가는 동안에도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東萊府使接倭使圖」・「釜山逋草梁和館之圖」에 묘사된 초량객사의 외관은 전패를 모시는 正廳과 관료나 조공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온돌방을 배치한 左右翼舍를 가진 조선시대 일반적 객사형식과 같다. 초량객사는 매번 수리마다 국왕에게 보고되면서도 조정의 관할이 아니라는 이중적 기준이 적용되었다. 왜관수리가 강력한 중앙의 통제에 의해 이루어진데 반하여, 초량객사로 대표되는 초량공해의 조영은 경상감영의 지시 아래 자치행정계통을 통해 이루어졌다. 초량공해의 공사행정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재목을 수취할 경우 釜山鎭이 담당하였고, 일반 물력을 수취할 경우 동래부사가 담당하였는데, 후자의 경우 留鄕所에서 面・里任으로 연결되는 자치행정계통에 의해 물력을 조달하였다. 감동인력은 材木을 구해야 하는 경우에는 개운포와 다대진이 담당하였고, 그 재료로 목구조를 결구하고 세부를 치장하는 수리공사는 釜山鎭과 東萊府가 맡고 있었다. 재목의 수취는 차사원의 활약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감작차사원의 경우, 왜관재목을 감작하는 개운포만호라는 점에서 초량객사의 재목수취방식이 왜관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수리공사의 경우 鎭堡의 邊將들이 공사를 담당하는 것이 전례화 되어 있었으나, 1873년 초량객사 중수에는 문・무관직이 다양하게 편성되어 공사를 감독하였다. 이러한 자치적 감동조직의 편성 아래 왜학 역관의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같은 시기 동래부 관아 건축에서 볼 수 없는 이례적인 것이다. 왜학역관이 감동관으로 활동하는 상황은 왜관수리공사의 경우와 같으며, 이로써 건축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초량객사는 동래부객사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외교시설로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술 장인들은 보상을 받고 공사에 참여했으나, 잡역은 무상노동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으며 수리 초기에는 釜山鎭 소속 土卒들이 동원되었다. 토졸의 과중한 업무 분담으로 이후 烟戶를 사역하게 되었다. 이처럼 19세기에도 여전히 民丁은 중앙권력에 의한 지배와 수취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조선후기 만성적 재정난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영공사의 사례가 모두 그러하듯이 공사비 지출을 줄이기 위한 다각적 노력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草梁客舍의 재원을 확보하는 방식은 草梁倭館 수리의 그것과 유사하나 역가 지급방식은 서로 차이를 보이는데, 초량객사에서는 米와 布로써, 왜관에서는 공가로써 지급하였다. 초량공해의 수리는 비교적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수리 요청이 생기면 지연 없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물력을 갖추었다. 초량공해의 수리를 담당한 관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여 공사를 잘 진행하여야 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으므로, 목재를 절약하고, 공사도구를 民으로부터 회수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어렵게 확보한 공사비의 지출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Abstract

This paper discusses the architectural activities of supervisors and artisans who belonged to Dongnae-bu of what is now the city of Busan and fundraising for building repairs through the construction of Choryang-gaeksa. Choryang-gaeksa had been located near the Choryang-waegwan, which was the largest international trading quarters between Joseon Dynasty and Tokugawa Shogunate had been maintained from 1678 through 1872 in Busan. This Korean traditional style building was used to perform the ceremony which was concerned with Joseon's diplomatic policy toward Tokugawa Shogunate. The government officials of the Joseon Dynasty enshrined the wooden tablet which was inscribed the Chinese letter Jeon(殿) whose meaning is the king of Joseon Dynasty and the envoys of Tokugawa Shogunate bowed before the symbolized plate because they could not be received in royal audience in capital of Joseon. Therefore, Choryang-gaeksa was more important than other government offices which were located Choryang area, and had more than 9 times repairing constructions for nearly 200 years since its establishment. Although the building was stationed right outside the wall of the Choryang- waegwan, the construction process of the building(Choryang-gaeksa) was definitely different from the usage which was carried on repairing of Choryang-waegwan. The construction of Choryang-gaeksa was achieved by local government(Dongnae-bu), whereas the architectural activities of Choryang-waegwan were regulated by the central government. The construction organization was consisted of superintendents, artisans and ordinary people who had to serve compulsory labor every period of public construction. Superintendents of the construction were called Chal-bang, Man-ho and Hun-do, who acted as civil or military officers as well. They struggled to secure and reduce construction expenses in order to accomplish construction work without damaging the provincial finance. Because artisans were under the authority of the local government, the superintendents could send them under escort on a case by case basis. Laborers had to do compulsory service without any compensation, in contrast to the cases of the constructions which were performed in th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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