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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 경복궁 중건 원납전의 납부 실태와 배경

The payment status and Background of wonnapjeon(願納錢) for the restoration of Gyeongbok Palace(景福宮) during the period of the King Gojong(高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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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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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경복궁 중건을 위한 원납전이 누구에 의해, 얼마가 수납되었는지 계량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현재까지의 연구에서는 원납전이 강제성을 띠며 백성의 원성을 자아냈던 고종 초년의 병폐라는 지적만을 했을 뿐 사료적 한계로 인해, 원납전을 구체적으로 누가 얼마나 냈는지, 어디에서 수취했는지에 대한 분석 없이 주요 인물의 상소 내용을 토대로 제기하는 정도였다. 필자는 『營建日記』를 통해, 경복궁의 원납전 납부 배경이 계층에 따라 다양할 수 있음을 제기했으며, 구체적으로 원납전이 왜 백성들에게 그렇게 큰 원망의 대상이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원납전을 납부 대상에 따라 개인과 단체 모금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개인 원납은 단체의 원납보다 상대적으론 적었으나, 총액이 중앙과 지방을 합쳐 2,790,895냥에 달하여 전체 총액의 1/3을 넘어선 액수로서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 이러한 개인적인 원납의 직역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이 지배계층인 양반층에서 납부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원납전의 납부 배경으로는 그간 설명했듯이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강제적 징수라는 일방적 배경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원납전의 납부는 물론 부정적 측면이 훨씬 크지만, 실제로 자원하여 납부한 경우도 확인된다. 즉, 관직 수여 등 개인적 영달을 목적으로 원납하였을 가능성도 높고, 지역사회에서 원납을 통해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 등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원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목적이든 양반의 개인적인 원납은 자발적인 요인도 확인된다. 물론, 돈 많은 개인에게 지역 사회에서 혹은 수령이 강제했을 가능성도 있었던 만큼 모든 개인적 원납이 자발적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다만, 개인의 원납에는 다양한 납부 배경이 있는 만큼, 모든 원납전이 강제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반면, 단체 납부는 훨씬 더 강력한 강제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체 납부는 전체 원납전의 55% 가량을 차지하는데 이는 개인적인 원납보다 많은 비용이다. 원납전은 한양과 유수부, 양도로 구분한 16개의 도에서 모두 납부가 확인되며, 각 도에서도 90%에 달하는 군현이 단체 납부를 수행하였다. 개인 납부의 군현별 추이를 합산하면 8개의 군현을 제외한 97%의 군현에서 납부가 확인되는데, 이는 전국의 모든 군현에서 원납전을 납부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군현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호구를 반영해 원납전을 분배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원납전은 각 도별 동전 稅入과 비교해도 유사한 비중을 보였다. 이러한 정황은 원납전이 단순히 자원에 의해 납부한 금액이 아니라는 점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 원납전의 납부가 지역별로 차등을 보였다는 점은 국가에서 각 지역적 상황을 철저히 고려해 원납전을 분배했을 개연성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원납전이 각 지역에 할당・분배되었다는 점은 그것이 민호에 부과한 별도의 세금이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단체로 수취한 원납전의 납부는 기존의 설명과 같이 강제성을 띤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단체 납부의 과정에서 나온 무수한 폐단을 모두 국가의 책임이라 할 순 없지만, 願納이라 써놓고 公納이라 불렀던 당대 관료들의 인식 속에서, 원납전은 명백히 강제성을 담보한 별도의 세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건일기』는 원납전 대상이 명확히 기재되어서 그간 몇 명의 언급에 의해 원납전이 백성의 怨聲이 자자한 충격적 강제 징수금이었다는 근거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국가에서는 고종 초년 『육전조례』의 편찬과 같이, 지역 사회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총력을 다하여 원납전이란 별도의 세금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는 국가의 민에 대한 장악력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종 초년의 국가적 역량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Abstract

This paper reviewed wonnapjeon(願納錢; Money paid on one's own account) for the restoration of Gyeongbok Palace(景福宮). Studies so far point out that wonnapjeon(願納錢) is a negative effect that is forced and has provoked resentment among the people. However, due to the limitations of the historical sources, the claim was made without any specific analysis. Through 'Yeongunilgi(營建日記; Architectural Diary),' I was able to get a detailed account of the wonnapjeon(願納錢) of Gyeongbok Palace. And I could see why wonnapjeon(願納錢) became the object of resentment among the people. I divided wonnapjeon(願納錢) into individual and group funds according to the payment target. Individual payments totaled 2,790,895, including the central and provincial levels. Most of the individual's payments were made by the ruling class. The background of payment of a person's wonnapjeon(願納錢) is also checked for volunteer payment. It was highly likely that he paid for personal gain, such as the acquisition of a government post. Of course, not all individuals' payments are voluntary, as there was a possibility of coercion in the community. However, the argument that all the pubs had a compulsion, as there were various backgrounds in individual payments, is open to reconsideration. Group payments accounted for 55% of the total. The group paid for by all Gunhyeon(郡縣; county) in the country. Also, most of the people shared wonnapjeon(願納錢). These circumstances prove that wonnapjeon(願納錢) is not simply paid by make one's own payment. The payment of these wonnapjeon(願納錢) differed from region to region. This indicates that the country may have distributed wonnapjeon(願納錢) considering the circumstances of each region. wonnapjeon(願納錢) was clearly a separate tax that guaranteed coercion. As such, 'Yeongunilgi(營建日記)' was clearly recorded as the subject of wonnapjeon(願納錢), so it was clear that the people's resentment was a high compulsory levy. The state, based on a solid understanding of the community, collected separate taxes with all its might. This clearly shows the circumstances under which the nation dominated th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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