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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津期초반 百濟의 對高句麗戰線과 對應

The Development of the Front Line between Baekje and Goguryeo and Baekje's Responses Right After the Transfer of the Capital to Woong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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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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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475년 한성이 함락 된 후 백제와 고구려 戰線의 추이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한성 함락 직후 백제와 고구려의 戰線을 어디로 비정하고 어떠한 상황이었는지가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는 두 나라의 영역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각 국의 입장에서는 안으로는 그 나라의 국방력 및 왕권의 강화와 관련될 뿐 아니라 밖으로는 대외적인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백제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고구려와의 戰線이 시급한 문제 중 하나였다. 기존의 연구는 주로 백제와 고구려의 입장에만 주목하여 양국의 戰線을 비정하였다. 이 논문은 그 당시 양국의 주변 상황 즉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중국과 백제와의 관계 그리고 양국과 신라와의 관계를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하여 살펴보았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의 새로운 수도인 웅진 깊숙이까지 내려왔었음에도 웅진이 함락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동성왕대에 백제가 다시 재건할 수 있었던 이유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주변국의 정세도 같이 고려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戰線을 推移해 보고 백제가 어떻게 고구려의 南進에 대응하여 새로운 왕도인 웅진을 지켜냈는지를 주목해 보았다. 2장에서는 특히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는 고구려의 남진 상황을 통해 고구려의 南進路를 유추하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그 전선의 위치를 비정해 보았다. 고구려는 사서의 기록이나 고고학 자료를 볼 때 한강 유역 전체를 통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 거점을 중심으로 선을 이어 진출로 확보에 주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3장에서는 잠시나마 백제의 왕도 근처에까지 내려와 있는 고구려에 백제가 어떻게 대응 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대응책은 두 가지였는데 축성과 신라와의 제라동맹 강화를 통해 고구려의 戰線에서 안위를 지켜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한 백제의 대응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을 서술해 보았다. 첫째, 축성을 통한 방어 체계의 구축은 백제가 축성 사업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수취체제가 복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어느 정도 백제 사회가 안정화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둘째, 또 하나의 대응책으로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맺어진 혼인동맹은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된 것이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태도를 함께 주시하면서 방어책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고구려에 공격을 당하는 신라를 지원함으로써 백제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백제는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고구려에 의해 한성이 함락된 직후 백제와 고구려의 戰線의 推移는 두 나라의 영역 뿐 아니라 각 국의 입장에서는 안으로는 그 나라의 국방력 및 왕권의 강화와 관련될 뿐 아니라 밖으로는 대외적인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고고학적 유물과 문헌 사료를 토대로 백제와 고구려의 戰線을 추이해 보았을 때 고구려는 청원 남성골 산성이나 대전 월평동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일시적이나마 백제 왕성인 웅진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지리적 위치와 성의 구조로 보아 오랫동안 주둔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 위치가 백제와 신라의 협공에 취약한 곳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직접지배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전략적 거점을 중심으로 선을 이어 진출입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왕도를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하였다. 먼저 축성을 통해 왕도를 견고히 방어하고자 하였다. 특히 동성왕대 대규모의 축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신라와의 우호관계 바탕으로 혼인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戰線은 백제의 왕도를 위협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위한 방비책인 축성은 백제로 하여금 수취체제를 상당부분 복구하여 안정화를 이루게 하였다. 그리고 신라와의 共助는 백제가 효과적으로 고구려를 방어할 수 있었고 이후 고구려로부터 공격을 받는 신라를 지원함으로써 백제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즉 고구려의 한성함락과 이후 남진은 백제 왕들에게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고 위협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가 다시 再建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Abstract

This thesis is the study on an investigation of how Baekje dynasty had responded to the threats of Goguryeo advancing southward after Baekje relocated its capital to Woongjin. Based on the archeological artifacts and historical materials in the literature, the study firstly traced the development of the front line between Baekje and Goguryeo. The mountain fortress of Namseonggol, Cheongwon and the Wolpyeong-dong relics of Daejeon indicate that Goguryeo moved down even to Woongjin, the relocated capital of Baekje at that time, even though it was temporary. Baekje made two choices to stop Goguryeo from advancing south further and defend its capital: firstly it built castles to protect the capital. One good example of that was a large-scale construction project during the reign of King Dongseong. The second option was that Baekje formed an alliance with the neighbouring country, Shilla through the marriage of two dynasty's families in order to build up robust alliance that provide Baekje with military power for stopping Goguryeo's invading to the south toward the new capital. In the middle of threatening of Goguryeo to the new capital of Baekje, the construction of castles as one of the defensive measures helped Baekje dynasty restore the collection system considerably and achieve stabilization of the country. Through its cooperation with Shilla, Baekje was able to defend itself from Goguryeo's invasion effectively and later exhibited its status home and abroad by giving assistance in reverse Shilla being invaded by Goguryeo. The events of Goguryeo's capturing Hanseong and advancing south were the challenges that the kings of Baekje must deal with on the one hand and also the reasonable backgrounds for Baekje's rebuilding its defensive system on the other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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