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世紀 高句麗의 南下와 三國의 領域向方 -『三國史記』 地理志 ‘高句麗故地’의 實際(Ⅰ) -
Goguryeo's Southward Advance in the 4~5th century and the Territorial Trend of three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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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중‧후반부터 예성강 유역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백제는 雉壤城〔황해 배천〕을 차지함으로써 예성강 중‧하류를 확보했고, 고구려는 水谷城〔황해 신계〕을 교두보로 삼아 예성강 상류의 동북쪽에서 백제를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결국 4세기 후반까지 두 나라의 국경선은 예성강 중류를 기점으로 대치하는 형국을 이어갔다. 이와 같은 양상은 廣開土王(391~412) 즉위 후 고구려의 일방적인 승세 국면으로 변화되었다. 광개토왕은 392년에 4만의 대군을 이끌고 친히 원정에 나서 예성강 하류의 石峴城과 천혜의 요지였던 關彌城을 함락시킨데 이어 396년에는 백제의 수도 漢城까지 함락하였다. 이때 아신왕(392~405)은 광개토왕에게 老客임을 자칭하면서 항복했고, 광개토왕은 그 대가로 남한강 상류 지역을 포함한 58城 700村을 획득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중부 내륙지방의 죽령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광개토왕이 勝戰의 결과물을 가지고 회군하면서 적어도 한강 유역에서 임진강 유역 사이에 대한 고구려의 영역지배는 관철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5세기 들어 북중국에서 北魏가 등장하면서 고구려 국력의 지향점이 요동 지역에 기울었고, 그에 따라 고구려의 남하도 실행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은 長壽王(413~491)이 백제 한성시대를 종식시키는 475년까지 대체로 예성강~임진강 선을 유지하였다. 광개토왕의 400년 南征을 계기로 고구려는 죽령로를 장악함으로써 國原〔충북 충주〕을 거점으로 삼아 태백산맥 서쪽의 강원도 전역과 충북 동쪽 일부를 영역지배〔선‧점지배〕하였다. 고구려는 400년 무렵부터 5세기 중반까지 신라의 영토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경북 일대를 세력권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것이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역지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곧 고구려의 영역은 소백산맥을 넘지 못했다. 그나마 신라 눌지왕(417~458)이 집권 후반기 고구려세력을 축출하면서 ‘고구려고지’로 남게 된 경북 일대의 세력권마저 급속히 소멸되어 갔다. 이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는 5세기 중반 이후 소백산맥과 동해안의 강릉을 국경선으로 삼아 대치하였다.
Abstract
Goguryeo and Baekje had lots of offensive and defensive battles to take the Yeseong River from the middle and late 4th century. The rela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became Goguryeo's superiority after King Gwanggaeto(391~412)'s enthronement. And Baekje transferred the capital from Hanseong to Ungjin in 475 after the invasion of King Jangsu(413~491). Since 400, Goguryeo taked the Jungnyeong route until in the middle of 5th. Goguryeo intervented Silla's politics. Furthermore stationed a troops in Territory of Silla. But it was not meaned domination of Territory. King Nulji(417~457) made an effort to escape from intervention of Goguryeo power. As a result, since in the middle of 5th Goguryeo and Silla stand face to face with in Sobaek mountains and the Gangneung of East-co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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