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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世紀 高句麗의 南方進出과 對新羅 關係

The Southward Advance of Goguryeo and the Relations with Silla in the 4~5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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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신라는 4세기 후반 백제를 사이에 두고 양국 간 군사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 결과 신라는 377년과 381년에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前秦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다만 이 시기 두 나라의 관계는 신라 측의 의도와 별개로 고구려에 의해 주도권이 행사되었다. 백제와의 대결구도에서 신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측면에서 견제하고 전략적 부담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측면에서 고구려의 이해가 더 관철되었고, 그에 따라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될 소지가 컸다. 이 시기 신라 사신단은 백제의 감시와 견제에서 안전한 ‘동해안로’를 이용해 고구려와 통교하였다. 곧 수도 경주에서 동해안로를 이용해 함흥지방에 이른 후 서북쪽으로 황초령을 넘어 장진-아득령-강계를 거쳐 國內城에 이르렀다.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종속적 우호관계는 廣開土王(391~412)의 南征으로 인해 심화되었다. 광개토왕은 396년에 백제로부터 58城 700村을 획득하며 남한강 상류까지 진출함으로써 중부 내륙과 영서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죽령로’를 장악하였다. 광개토왕은 400년에 왜군이 신라를 쳐들어오자 5만군을 파견해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신라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명분과 기회를 증폭시켜갔다. 다만 광개토왕의 남방진출은 後燕의 침략으로 인해 적극적인 영역지배보다 군사적 거점지배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고구려는 나물왕 직계와 방계 간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해 實聖王(402~417)과 訥祗王(417~458)의 즉위에 개입하였다. 長壽王(413~491)은 눌지왕 즉위 후 신라 왕경에 군사를 주둔시켰고, 신라에게 공납의 부담도 가중시켰다. 이에 눌지왕은 고구려세력을 배제하고자 했다. 눌지왕은 먼저 425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卜好를 탈출시켰다. 그리고 433~434년에 백제의 제안을 수용해 羅·濟同盟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427년 평양천도를 전후해 복잡했던 내부사정과, 430년대 이후 증폭된 北魏와의 갈등으로 인해 신라에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장수왕은 오히려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이탈해가는 신라를 회유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구사하였다. 그 결과물이 450년에 건립된 「中原高句麗碑」였다. 장수왕은 곧 國原[충북 충주시] 진출을 기념하고 고구려 국력을 과시하여 신라를 회유하고자 눌지왕을 국원으로 불러 형제관계임을 천명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급속히 이완되어 갔다. 450년 7월에 고구려 변방장수가 悉直[강원 삼척시]들에서 사냥하다가 何瑟羅[강원 강릉시] 城主에게 살해당한 사건은 그 서막이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불안했던 우호관계는 453년 7월 신라가 왕경에 주둔해 있던 고구려 군사 100명을 誅殺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급기야 고구려가 이에 대응해 다음해 신라를 쳐들어오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대립국면으로 변화되었다. 고구려는 이후 신라에 대한 공세의 수위를 높여갔다. 먼저 468년에 靺鞨軍 1만을 거느리고 신라 북변의 悉直城을 공취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신라가 장악하고 있던 何瑟羅를 통하지 않는 우회로를 이용하였다. 신라는 이에 468년 9월에 하슬라인을 동원해 泥河[강원도 정선군 송계리산성]에 성을 쌓았다. 이것은 고구려 남진의 최종 방어선이자 전진거점이었던 삼척의 실직성을 방어하기 위한 조처였다. 468년 이후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공격은 백제와의 관계로 인해 소강상태를 맞았다. 이에 慈悲王(458~479)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성을 구축하였다. 특히 소백산맥의 지형적 특성상 북사면이 남사면보다 경사가 완만해서 고구려군이 군사작전 시에 신라군보다 유리했기 때문에, 신라의 축성사업은 소백산맥 서록과 금강 상류에 집중되었다. 신라는 470년 三年山城[충북 보은군] 축조를 시작으로 471년 芼老城, 474년에는 一牟城[충북 청원군 문의]·沙尸城[충북 옥천군 이원면]·廣石城[충북 영동군]·沓達城[경북 상주시 화서면]·仇禮城[옥천군 옥천읍]·坐羅城[영동군 황간면] 등을 쌓아 방어체제를 마련해 나갔다. 고구려는 475년 백제 한성을 공략한 후 신라에 대한 남방진출을 본격화했다. 먼저 481년에 말갈군과 함께 북변을 침입해 狐鳴城[경북 청송군 또는 영덕군] 등 7城을 빼앗고 彌秩夫[경북 포항시 흥해]까지 진군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남한강 상류 정선에서 니하성을 우회해 태백산을 넘어 봉화-예안-진보(청송)-영해-영덕-흥해로 진격하였다. 전쟁의 결과는 백제·가야와의 공조가 뒷받침된 신라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작전선을 바꾸어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미호천 유역을 공략하였다. 하지만 484년에 발생한 母山城[충북 진천군] 전투 역시 나제동맹군의 활약으로 고구려가 대패했고, 그 결과 고구려는 미호천 서쪽의 남진교통로를 상실하였다. 이 때문에 文咨明王(491~519) 즉위 후의 신라에 대한 공세는 주로 국원을 거점으로 파병되었다. 고구려는 494년 7월 薩水原[충북 괴산군 청천면]에서 신라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또한 496~497년 신라의 牛山城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문자명왕대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압박은 지속되지 못했다. 도리어 신라가 智證王(500~514) 즉위 후 504년에 波里城 등 12성을 축성하는가 하면, 다음해 異斯夫를 悉直州 軍主로 파견해 동해안로 방어체제를 완비하였다. 512년에는 于山國까지 복속하여 고구려의 對倭航路를 차단하고 동해안 일대의 제해권마저 장악하였다. 결국 고구려의 대신라 남방진출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Abstract

The Relationship with Goguryeo and Silla became closer late 4th century. Silla dispatched an envoy to Junjin and resumed negotiations between the countries having help from Goguryeo in 377·381, provided that Silla was dependent on Goguryeo for it. So King Namul(r.356~402) had to send Silsung to Goguryeo as a hostage. At that time route of communica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was the ‘East Sea route’. King Gwanggaeto(r.391~412) rescued Silla with 50,000 troops when Wae invaded Silla in 400. Since that time Goguryeo taked the ‘Jungnyeong route’ until in the middle of 5th. Goguryeo intervented Silla's politics. Furthermore stationed a troops in Territory of Silla. But it was not meaned domination of Territory. There were interventions of Goguryeo power to the enthronement process of King Silsung(r.402~417) and Nulji(r.417~458). After accession to the throne, King Nulji made an effort to escape from intervention of Goguryeo power. He first made his brother Bokho who was sent to Goguryeo as a hostage in the King Silseong’s region return in 425 and entered into the alliance between Silla and Baekje in 433 to 434. Hereupon, Goguryeo King Jangsu(r.413~491) promoted a covenant of Gugwon to conciliate Silla. As a result, King Jangsu and Nulji performed a ceremony to swear to be brothers there. In spite of it, the relation of the two countries went on tightness rapidly in 450, a Goguryeo commander of the border areas who went hunting in a field of Siljik was killed by the lord of Haslla after all. King Nulji also murdered Goguryeo troops a hundred strong stationed in Gyeongju. Because of the murder case, friendly relations between Silla and Goguryeo changed to antagonistic relationship in the middle of the 5th century. Since then Goguryeo have started millitary attacks on the Silla. First, Goguryeo occupied Siljik castle with 10,000 troops of malgal in 468. Because of this, Silla constructed a castle in Niha[Songge-ri castle, Jeongseon-gun in Gangwon-do]. King Jabi(r.458~479) had built a line of defense against Goguryeo from the fortification of Samnyeon castle in 470 to 474. King Soji(r.479~500) constructed the 1st defense line in Boeun area outside of the Sobaek mountains, and did the 2nd defense line in the main inland traffic routes, Sangju and Uiseong etc. As a result, since in the middle of 6th Goguryeo and Silla stand face to face with in Sobaek mountains and the Gangneung of East-coast. Goguryeo took a offensive position to Silla after 475, but it hard fighting because of a counterattack by the allied forces between Silla and Baekje. Besides, King Jijeung(r.500~514) had finally built all 12 castles, Pari·Misil·Jindeok·Golhwa castle etc, for the military policy to Goguryeo in 504. Also he gave orders Isabu to make Usan-guk submit to Silla. Thus, Silla secure the command of the sea in the east-coast areas after all. Finally, The Southward Advance of Goguryeo came to dead s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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