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對후연관계와 요동 확보의 의미
The Relationship between Goguryeo and the Later Yan and the Significance of Securing Liao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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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에 전개되었던 고구려와 후연의 관계를 통해 고구려의 요동 진출 양상을 재검토하고, 후연과 고구려의 입장에서 요동의 전략적 가치를 파악하며, 나아가 고구려의 요동 확보가 가지는국제관계사적 함의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능비」 영락 5년조에 수록된 395년 광개토왕의 요동 순행 기사와 『양서』 고구려전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의요동군 경략 기사는 고구려의 요동 진출 시점을 가늠하는 필수 사료이다. 이 글에서는 두 개의 사료를 재검토함으로써 고구려가 395년 이전에 요동 일대로 진출하였다는 기존의 학설을 재확인하였다. 이와 함께 그동안주목하지 않았던 『십육국춘추』 및 『십육국춘추집보』의 기록을 이용해 고구려가 4세기 후반 요동으로 진출하였을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후연은 4세기 말까지 고구려의 요동 진출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400년 모용성이 즉위하면서부터 후연의 상황이 바뀌었다. 모용성은 중원 회복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후연의 재흥을 위해 요동 수복을 꾀하였다. 과거 전연처럼 요서와 요동을 연계함으로써 중원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요동을둘러싼 고구려와 후연의 공방전은 격화되었다. 요동은 후연의 재도약의 발판이었다. 한편 요동은 후연뿐만 아니라 고구려에게도 중요한 도약의 공간이었다. 고구려는 요동을 확보한 후 이 지역을 자국에 필요에 적합한 공간으로 재편하였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城과 교통로의 재편이다. 특히 교통로의 재정비는 5세기 고구려 국제관계의 특징과 연계된 중요한 지점이다. 실제로 고구려는 요동을 확보한후, 요동이 가진 연결망의 허브라는 속성을 이용해 이전보다 다양한 세력과 교섭하였다. 이는 5세기 고구려국제관계의 특징인 국제관계의 장기지속화, 안정화, 다면화의 토대가 되었다.
Abstract
This text purposes to examine the expansion of Goguryeo(高句麗) into Liaodong(遼 東)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Goguryeo and Later Yan(後燕), which unfolded from the late 4th century to the early 5th century. Moreover it seeks to understand the strategic value of Liaodong and further clarify the implications of Goguryeo's securing of Liaodong in the context of international relations. The records of King Gwanggaeto's tour to Liaodong in 395, found in the “The Stele of King Gwanggaeto(廣開土王碑)”, and the accounts of Goguryeo's military activities in Liaodong in the “Liangshu(梁書)” are essential sources for gauging the timing of Goguryeo's expansion into Liaodong. By re-evaluating these two historical sources, this article reaffirms the existing theory that Goguryeo expanded into the Liaodong region before 395. Additionally, it explores the possibility that Goguryeo ventured into Liaodong in the late 4th century by utilizing records from the “Shiliu guo chunqiu(十六 國春秋)” which had not been previously emphasized. Until the late 4th century, the Later Yan did not show any significant response to Goguryeo's advance into Liaodong. However, the situation changed with the ascension of Murongsheng(慕容盛) in 400. In a context where recovering the Zhongyuan(中 原) became difficult, he sought to seek revival Later Yan by reclaiming Liaodong. He dreamed of recovering the Zhongyuan by linking the Liaoxi(遼西) and Liaodong regions, similar to the past with Former Yan(前燕). As a result, the conflict between Goguryeo and Later Yan over Liaodong intensified. In short, Liaodong was a stepping stone for Later Yan's national revival. Liaodong was also an important area for Goguryeo. In fact, after securing Liaodong, Goguryeo reorganized the region according to its own needs. Notably, the reconstruction of transportation routes stands out. The issue of transportation routes is also useful for examining Goguryeo's international relations in the 5th century. Through various transportation routes connected to Liaodong, Goguryeo engaged with various powers active in North China(華北), Shandong(山東), the Jiangnan(江南), and the steppe. Unlike the previous periods, the negotiations between Goguryeo and these powers in the 5th century took on a long-term nature, influenced by Liaodong's characteristic as a hub of connectivity. In summary, securing Liaodong became the cornerstone of the multi-faceted diplomacy that characterized Goguryeo's international relations in the 5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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