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六臣 담론의 轉變과 조선후기 詩歌의 수용 양상
The shift of the Discussion of Sayukshin and the Aspects of the Acceptance of Poetry of Late Ch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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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고에서는 우선 사육신 담론이 정치적 맥락을 넘어 사회적으로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살펴보고, 그러한 인식의 변화를 바탕으로 문학에 나타난 사육신의 모습을 고찰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 과정에서 기억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우선 前史적 단계로 조선시대 사육신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고찰하였다. 사건의 발생 초기에는 逆賊 혹은 亂臣으로 호명되는 경우가 잦았고, 무정보감에도 이름을 올리면서 국가적으로도 그들을 역적으로 분류하였다. 물론 남효온이 「육신전」을 통해 사육신을 절의의 인물로 그려 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인 글이었고, 위험한 글로 치부되어 쉽사리 전해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16세기로 접어들면서는 사육신을 충신으로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하게 일어나면서, 역적에서 충절의 인물로 점차 기억의 전환이 일어났다. 사육신의 복권은 숙종대로 접어든 17세기 후반에 와서야 이루어진다. 사육신을 충신으로 인정하는 것은 현 왕조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딜레마를 임금과 신하의 義는 다르다는 ‘君臣分義’라는 개념을 통해 극복함으로써, 전격적으로 복권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복권은 곧 공식적으로 충신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후 영․정조 시대에는 국가가 주도적인 위치에서 사육신에 대한 추숭작업을 진행하였다. 묘를 정비하고, 묘비를 세우고, 곳곳에 서원을 건립하였으며, 때때로 치제를 올리면서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사육신에 대한 기억을 공간화하는 것이었고, 이는 계층을 넘어 일반 평민들에게도 사육신에 대한 공통된 기억을 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노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사육신을 배향하면서 추숭작업이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이 때 사육신은 단순한 충절의 인물이 아니라 유가에서 요구하는 도덕적 이상형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3장에서는 2장에서 탐색한 담론의 변화를 바탕으로 시조에 나타난 사육신의 모습을 고찰하였다. 사육신은 원래 개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진 집단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사대부층의 문학인 漢詩에서는 사육신의 개별성은 퇴색되고, 사육신이라는 집단이 갖고 있는 절의라는 공통된 이미지가 투영된다. 이러한 모습은 복권의 이전과 이후가 다르지 않은데, 성리학적 전통 아래에서 사대부들이 사육신을 기억하는 방식이 절의의 측면을 부각하면서 이루어졌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점차 향유층을 넓혀 가던 시조의 경우에 있어서는 사육신의 집단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개별적 형상이 반영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는 사육신이 작품의 소재로서가 아니라, 작가로 비정되기에 일어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 작품의 작가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사육신’이 아니라 개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조 작가로의 수용이 한 번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 중에서도 중심적인 인물이 먼저 작가로 비정되었고, 작품의 주제적 층위에 있어서도 그들이 주는 1차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는 節死 혹은 戀君의 노래에서 점차 避世․閑居류의 작품으로 확장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는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육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Abstract
This study is aimed to examine the changing process of the discussion of Sayukshin(the six martyred scholar-officials) socially beyond the political context and explore the features of Sayukshin in the literature. In the process of this, existing memories of Sayukshin was actively used. In the chapter 2, the changing process of discussion on Sayukshin in the Choseon Dynasty was studied. In the beginning, they were branded traitorous subjects and categorized nationally as such in Mujeongbogam. Although Nam Hyo-ohn described Sayukshin as loyal vassals in his book Yukshin-jeon, it was considered a personal writing as well as a dangerous piece of writing. Therefore, it was difficult to be spread. However, entering the 16th century, the movement of acknowledging Sayukshin as royal subjects emerged consistently and the transformation of memory of them gradually happened. And then they were redefined as royal subjects rather than traitorous subjects. The reinstatement of Sayukshin was completed in the reign of King Sukjong in the late 17th centry by removing the dilemma of recognizing Sayukshin as loyal subjects against the present dynasty based on the concept of the proper righteousness between a king and subjects or the "Gun-Shin Buneui" philosophy. The reinstatement officially enabled Sayukshin to be acknowledged as royal subjects. In the reign of king Yeongjo and Jeongjo, the dynasty played a leading role to promote the project of honoring of Sayukshin as loyal vassals. Their graves were organized and gravestones were set up. Memorial halls were built in many places and held services to honor them. This series of process produced spatialization of memories of Sayukshin, which led the common people to regard them as royal subjects.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project of honoring of Sayukshin got into full swing by the construction of the Baeshik-dan stand(an attached stand for food-offering) at the Noreung mausoleum. Sayukshin eventually came to be memorized not only as loyal vassals but also as the ethical ideal for confucianism. In the chapter 3, the features of Sayukshin in the literature was examined based on the change of discussion of Sayukshin explored in the chapter 2. In spite of the concept of a group of six individual leaders, the individuality of Sayukshin faded out and the vassals' loyalty of Sayukshin strongly remained in Chinese poetry of confucian elites. However, there was not much difference between pre-and post-reinstatement in the recognition of Sayukshin. That was because under the tradition of neo confucianism the way of confucian elites memorizing Sayukshin was completed by emphasizing their loyalty to the king. In the case of sijo increasing the number of its readers, the image of individuality as well as the image of a group of Sayukshin was reflected. Sayukshin was comparatively set as writers rather than materials of works. To be firmly recognized as a writer of a work, they needed to get attention not as a group of Sayukshin but as an individual. Such general acceptance as a sijo poet was not established at a time though. Leading figures of Sayukshin including Seong Sam-moon, Park Pang-yeon were comparatively set as a writer first.Themes of their works were stretched to poems expressing a leisurely life including poems showing their loyalty to the king and Yeongun(the song of longing for the absolute object). This resulted from the change of social recognition of Sayukshin with th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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