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因山時 국왕의 山陵 隨駕에 대한 고찰
A Study on Sanreung Suga by the King at the Time of Insan in the Early Period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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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고는 士大夫家에서 장례 때 喪主가 靈駕를 隨從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조선의 國喪에서도 因山 당일 국왕이 山陵에 隨駕하도록 『국조오례의』에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조선 왕가에서 산릉 수가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王5와 士大夫5에 차이가 있음을 언급한 뒤, 『오례의』 조문이 점차 사문화되면서 隨駕 不可가 祖宗朝의 前3로 정착되는 과정을 밝히고, 아울러 祗送ㆍ祗迎 및 下玄宮時 望哭5가 수가를 대체하는 대안의 變5로 등장하는 과정을 천착하였다. 인산 때 국왕이 산릉에 親臨하는 것은 天理와 人情에 부합하는 孝의 당연한 도리이므로, 국초의 태종과 세종 및 문종은 산릉 수가를 실행했으나, 단종ㆍ예종ㆍ성종은 즉위 초반의 불안정한 정국 때문에 대궐을 떠나기가 어려워 임시변통으로 산릉에 수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前史는 성종 14년 정희왕후 국상과 연산 초반 성종의 국상에 하나의 전례로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오례의』의 수가 조문은 점차 퇴색되고 수가 不可가 지켜야 할 조종조의 전례로 자리잡아갔다. 한편, 정희왕후의 국상 때는 수가하는 대신 처음으로 祗送이 명시되었는데, 연산조에는 祗送과 祗迎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지만, 중종 25년 정현왕후의 국상 때 다시 한 번 지송을 공식화함으로써, 향후 지송과 지영을 수가의 대안으로 정착시키는 초석을 확고히 마련하였다. 하지만 산릉 수가는 여전히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어 있었기에, 『오례의』조문대로 국휼을 치르려는 국왕들은 으레 이 문제로 신료들과 왈가왈부 언쟁을 벌였다. 조선전기에는 인종과 선조가 그러했는데, 언쟁의 결과 인종조에는 발인 당일 수가하는 대신 하현궁 무렵에 친림하는 절충안이 제시되었고, 그로부터 연동되어 선조조에는 하현궁 시각에 맞추어 대궐에서 망곡하는예법이 창안되었다. 하현궁時 친림 논의에서 출발하여 成法이 된 하현궁時 망곡례는 지송ㆍ지영과 함께 수가를 대체하는 國喪의 常法으로 안착되어, 영조조 『국조속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그 의절이 수록되었다. 그리하여 조선후기 국왕들은이제 발인 당일 지송하고, 하현궁 시각에 대궐에서 망곡례를 거행하며, 返虞하면 지영하여 魂殿에서 初虞祭를 지내는 수순으로 治喪하게 되었다.
Abstract
This study puts up the following points that summarize its findings. First, 『Gukjo Oryeeui』 provides that in a state funeral of Joseon, the king should follow the deceased to the tomb on the day of that funeral like when the family of the noble class holds a funeral, the chief mourner follows the dead to the tomb. But in fact, there's few or no actual case that the provision was observed. Thus, funeral rites were different between the royal court and noble families. Second, accompanying the deceased by the king to the tomb at the time of the state funeral was implemented in the early period of the country's foundation under a notion that the move coincides with filial piety principles based on the natural law and humanity. But as the above provision of 『Gukjo Oryeeui』 became ineffective over time, no following the dead by the king to the tomb was established as a ritual. Third, instead of the following, the king performed some alternative rituals such as sending off the deceased from the court with respect on the day of the funeral[祗送], receiving the ancestral tablet with respect after the funeral completion[祗迎] and reciting a funeral dirge while viewing the tomb far away from the court at the time of burying the dead[下玄宮時 望哭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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