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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 晉州 大谷里의 토지소유 양상과 신흥계층

A feature of landholding and a new-rising class of Jinju Daegok-ri in the early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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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철학

초록

이 글에서는 『大谷家座』라는 가좌성책을 바탕으로 1830년대 진주 대곡리의 토지소유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 자료에 의하면, 기존의 연구에서 제시된 것과는 달리 結名은 幼學층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군역을 지는 자까지 다수가 사용하고 있었고, 19세기에 와서도 복수의 결명을 사용하는 자의 비율이 30%를 넘었다. 조선 후기에 농민의 토지소유와 경영의 영세화 추세가 진행되어 갔다는 기존 연구와는 달리, 대곡리에서는 非班戶만 보더라도 호당 평균 소유면적은 63.5부이고 50부 이상의 토지소유자가 전체 소유자의 과반을 차지한다. 토지 미소유자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 이런 차이는 지역적 차이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기존 연구에서 이용되었던 자료의 한계에서 발생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대곡리에서는 마을별로 평균 토지 소유규모가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班戶의 경우, 가문 간에도, 가문 내에서도 토지소유의 분화 현상이 심하다. 비반호의 경우, 평균 소유규모가 비교적 큰 마을에는 반호가 거주하고 있지 않고 신흥계층 가문이 밀집해 거주하고 있다. 소유규모가 적은 마을에는 반호가 비교적 많이 거주하고 있고, 노비호도 많다. 신흥계층 중에 여러 가지 노력을 통해 유학으로 등록되고 나아가 대곡리에 대한 행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가고 있던 일부 성씨의 경우, 평균 토지소유 면적이 기타호보다 훨씬 많았다. 이 성씨들은 대부분 마을별로 밀집해 거주하고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기타호 중에도 1결 이상을 소유한 자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회만 있으면 신분적 지위를 높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Abstract

This study examined the landholding status of Jinju Daegok-ri in 1830s based on the Gajwaseongchaek(resister of the residents) called ‘Daegokgajwa(大谷家座)’. According to this resource, contrary to the previous studies, Gyeolmyong (結名) was not only used by the class of Yuhak(幼學) but also used by many who had a general military service. And even in the 19th century, the ratio of those who used multiple Gyeolmyeong was over 30%. Different to the previous studies that argued the recession of landholding and farming of farmers in the later Joseon, the Daegok-ri case shows that average landholding area was 63.5 Bu(負) in Non- Banho(非班戶), and almost half of landowners possessed over 50 Bu. Furthermore, not many were landless. Such differences may occur thanks to local differences, but the limitation of existing resources that were employed cannot be ignored. In Daegok-ri, there were strong differences in the size of landholding per village. As to Banho(班戶), the division between families and even within families was severe. As to Non Banho, in a village with large average landholding, Banho does not reside in there, but new rising families resided densely. A village with small holding size had many Banho residents and also Nobiho(奴婢戶). Among the new rising classes, some families who actually led the administration of Daegok-ri by registering Yuhak with huge effort possessed far bigger land than other households in average. These families used to populate in villages in a compact mass with superior status in terms of economy. Those who owned over 1 Gyeol(結) among other households must have endeavored to improve their status if possible based on their economic power.

참고문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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