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중반 羅日關係의 推移와 金泰廉 使節團의 渡日
Transition of Silla-Japan Relations in the Middle of the 8th Century and the Kim, Tae-ryeom Mission to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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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8세기 중반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정치적 긴장이 표면화된 상태에 있었다. 735년 2월, 신라 조정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국이 “王城國”임을 표방하자 일본 조정은 사신을 돌려보냈다. “왕성국”은 신라가 당의 제후국임을 표방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천황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 세계관을 가지는 일본에 대해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자국이 우위에 있음을 확고히 하는 데 작용하였다. 이후 양국 사이에 외교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는 등 정치적 긴장이 표면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752년에 약 9년 만에 양국 간의 외교가 진행되었다. 이때 신라는 왕자 김태렴을 필두로 한 700여 인이라는 사상 최대의 규모를 갖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김태렴 사절단은 신라 사신으로서 약 17년 만에 일본의 京에 들어가 교역 활동을 비롯한 외교를 진행하였다. 김태렴 사절단에 관한 기록을 보면 대체로 그들이 일본에서 朝貢國으로서의 禮를 갖추어 외교를 진행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김태렴 사절단이 파견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와 같은 외교 방식을 취하였다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는 일본 율령법의 이념에 의해 윤색된 기록을 근거로 도출된 것이다. 일본 측 사료에는 김태렴 사절단이 상위 국가로서의 예를 갖추어 일본과의 외교를 진행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되나, 기존 연구에서는 이를 간과해 왔다. 일본 조정은 김태렴 사절단에 대해 외교 방식에 관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였다. 이는 752년 4월에 거행된 東大寺 大佛開眼會를 통해 형성된 새로운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신라에 대해 조공국으로서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종래의 대일 외교 방침을 유지하였다. 김태렴 사절단의 도일은 일본 조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신라 조정은 김태렴 사절단을 파견하여 요청된 물품을 전달하는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교역 활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 조정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으로서, “왕성국” 표방 이래 일본과의 사이에 표면화된 정치적 긴장 속에서 다시금 자국의 문화적․권위적 우위성을 과시하며, 나아가 대내적으로도 왕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었다.
Abstract
In the middle of the 8th century, political tensions had surfaced in Silla-Japan relations. In February 735, the court of Silla claimed that his country was a "Wand Seong Guk" through his messenger, and the Japanese court sent his messenger home. “Wand Seong Guk” is a symbolic expression that advocates that Silla is a Tang lord, and its own country is superior to Japan, which has its own world view centered on the Emperor, in the international order of East Asia Worked to ensure that Later, political tensions surfaced, with a conflict between the two countries over diplomatic systems. Under these circumstances, diplomacy between the two countries took place in 752 for the first time in about nine years. At this time, Silla dispatched the largest mission ever in Japan, with about 700 people led by prince Kim, Tae-ryeom. The Kim, Tae-ryeom Mission entered the capital of Japan for the first time in about 17 years as an ambassador to Silla and conducted extensive diplomacy, including extensive trade activities. According to the records of the Kim, Tae-ryeom Mission, they stated that they had advanced diplomacy in Japan as the Empire. It has been understood in previous research that Kim, Tae-ryeom's diplomatic approach was used to achieve the mission purpose. However, the record of the Kim, Tae-ryeom Mission is not likely to convey the actual situation, because it is based on the principles of the Japanese Ritsuryo Law, centered on the Emperor. In fact, it has been confirmed in the Japanese archives that the Kim, Tae-ryeom Mission adopted a diplomatic system as a high-ranking nation and advanced diplomacy with Japan. The Imperial Court of Japan has presented the mission to Kim, Tae-ryeom with diplomatic requirements. This was based on a new world view formed through the opening of the Great Buddha Eye of Todaiji Temple in April 752, and demanded that Silla establish a gratitude as a tributary country. However, Silla did not accept this, and maintained its foreign policy with Japan, which has been adopted since the "Wand Seong Guk Case". The arrival of the Kim, Tae-ryeom Mission to Japan was at the request of the Japanese court. The Shilla Imperial Court dispatched the Kim, Tae-ryeom Mission to send the requested goods and at the same time conduct trade activities to pursue economic benefits. The dispatch of a large delegation, led by the Prince, was due to the political intentions of the Silla Court. It was to show off and to increase the status of the kingdom in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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