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文書를 통해 본 조선후기 稷山鄕校의 운영실태
The actual management conditions of Jiksan-Hyanggyo(稷山鄕校) in the late Yi dynasty studied with historical Manuscripts
0
조회
0
다운로드
8
인용
0
참고문헌
초록
이 글은 조선후기 향교운영의 한 事例硏究로, 현재 稷山鄕校에 남아 있는 古文書와 記文을 분석한 것이다. 조선후기 직산향교의 沿革, 儒生의 姓氏와 鄕約을 통한 향촌 활동, 量案 및 賭租記 분석을 통한 재정 기반, 重修節目의 분석을 통한 중수한 내용 등 직산향교 운영의 구체적인 모습을 밝히고 있다.직산향교는 18세기 이후 10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후기 직산향교 儒生들은 향교운영규약인 校憲節目을 제정하여 운영하였다. 靑衿錄과 先案의 분석을 통해 확인한 결과, 향교를 出入한 주요 성씨는 李氏, 金氏, 崔氏, 吳氏, 洪氏, 朴氏, 鄭氏, 閔氏 등으로, 이들은 1752년에 儒鄕이 合席하여 鄕案을 만들었으나, 점차 非 兩班 출신의 향교출입으로 인해 종전의 양반들은 靑衿錄에 기록되는 것을 기피하였다. 직산향교의 財政 중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은 鄕校畓의 賭租였다. 1856년의 量案에 수록된 田畓은 밭 4結 36負 7束, 논 2결 88부 4속, 합계 7결 40부 2속으로, 조선시대 縣의 鄕校에 支給되던 法定 額數인 5결을 초과하고 있었으며, 여기에서 거두어 들인 賭地 額數는 50여 石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직산향교의 재산은 이후 査推와 買入을 통해 계속 증가하였다.稷山聖廟重修節目을 통해 1841년에 있었던 직산향교 大成殿의 중수를 검토해 본 결과, 조선시대 향교의 중수는 儀禮節次가 매우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重修工事時 材木과 副材의 負擔, 役軍의 動員은 각 마을에 고르게 배당되었고, 財源의 마련은 官의 劃下錢 외에 齋任과 儒生의 扶助錢 및 校生의 願納錢으로 충당되었으며, 주로 人夫의 工錢과 재료비, 食價로 사용되었다.
Abstract
The actual management conditions of Jiksan-Hyanggyo(稷山鄕校) in the late Yi dynasty studied with historical Manuscript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