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향교 소장 고문서를 통해 본 19세기 錦山의 재지세력
A study on the Movement of Geumsan-Sajok(士族, Local literati) in the 19C. ― centering around Geumsan-Hyanggyo(錦山鄕校) historical Manuscrip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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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금산지역 재지사족의 실태와 1871년 서원훼철령 직후 금산 유림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펼쳤는지 금산향교 소장 고문서를 바탕으로 확인한 것이다. 금산향교에는 향교에서 작성한 문서류, 관에서 향교에 보낸 문서, 수집문서 등이 전해지고 있고, 내용을 보면 향교가 사족들의 집합소로 기능함에 따라 생산된 문서가 많다. 또한 기록 시기는 서원 남설과 재지사족의 전횡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던 18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금산은 이른바 ‘충청5현’이라 불리우던 기호유학 계열의 유학자들이 강학하던 공간이었고, 조선 후기에 8개의 서원 사우가 건립되어 중앙의 사화와 환국에 따라 치폐가 거듭되었다. 그러나 점차 서인 노론계가 금산지역을 장악하여 금산 사족의 성향도 노론계에 크게 기울었다. 그리고 이들이 19세기까지 기득권을 가진 계층으로 존재하였다. 서원이 부흥하는 동안 향교는 급격히 쇠퇴하여 1765년(영조 41) 전라도 관찰사 沈履之가 도내 서원에 보낸 절목에서 재지사족들이 향교를 업신여기며 폐단을 일삼는 사회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향교가 부상하게 된 것은 1871년 서원훼철령 이후, 서원 소유의 재산이 향교로 이관되고 서원에서 활동한 사족(유림)들이 향교로 눈을 돌리면서 부터였다. 서원에서 활동하던 문중은 향교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향약계 사마재계 등을 조직하고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금산향교의 문서를 보면 18세기 금산향교에서 활동한 주요 성씨는 조선후기부터 이어진 재지적 기반의 문중이었다. 그러나 1886년 고종의 윤음에 따라 관학원이 창설되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교육 체제가 시행되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동학농민혁명 후 유림들은 사재를 출연하여 향교의 대대적인 중수를 추진하는데, 참여자 명부에서 완전히 새로운 성씨가 등장하는 것이다. 금산향교 소장 문서는 매우 한정적이지만, 18세기 향교의 쇠퇴를 수령권을 통해 개선하고자 하였던 국가정책의 시행과 서원훼철 후 지방유림 사회가 향교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기존의 기득권층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대사회가 시작되자 새로운 유력 집단이 등장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Abstract
This is a case study on intended to monitor the trends of 19th-century Geumsan-Sajok(士族, Local literati) through the Geumsan-Hyanggyo records. And right after 1871(Seowon demolishing), identified the changes in Geumsan-Yurim. Geumsan-Hyanggyo has been a large collection of 18~19th century Manuscripts. It was material is compiled by hand and sent to Hyanggyo from the government and a collected books. In the 18th century, the abuse of power of the Jaeji-Sajok(在地士族) and an excessive number of Seowon were problems. Geumsan is where Kiho Confucianism called 'Chungcheongohyeon' taught students. And Eight Confucian Academy(Seowon) were established, with political activities centered around each Seowon. In the late Joseon period, Geumsan was dominated by Noron party and the Seowon was revived but the Hyanggyo has become weak. It was in 1871(Seowon demolishing) when the Geumsan-Hyanggyo regained its power. when the Hyanggyo came to possess the estate of the Seowon, students who studied at Seowon became interested in the Hyanggyo. In particular, Moonjung(Clan), the owner of the Seowon, organized a meeting and work together at Hyanggyo. In 1886 a public education system was created under the direction of the King Gojong, and in 1894, a new educational system was implemented. Then, the Yurim figures of the Hyanggyo paid their fortune to repair the Hyanggyo. At that time, a new class of people was involved in repairing the building. They were new people who became 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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