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평산 신씨 노비 가족의 존재양상 -노비의 결혼과 가계 계승을 중심으로-
The Modalities of Being of Slave Family in Jincheon Pyeongsan Shin’s Family
0
조회
0
다운로드
8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이 글은 평산 신씨 가문의 호적자료를 바탕으로 노비와 그 가족의 존재양상을 검토한 것이다. 이 가문의 노비는 모두 1,538구였고, 18세기 초반까지는 200~300구 정도를 소유하였으나, 이후 크게 감소하여 19세기 후반에는 1구에 불과하였다. 이들 노비 가운데 솔노비는 385구(25.0%)이고, 외방노비는 734구(47.4%)이며, 도망노비는 418구(27.3%)이다. 외방노비는 18세기 중엽 이후 통제력이 무너지고 세습원리가 변화한 가운데 束伍軍의 賤隷化에 따른 사노비의 군역 기피와 관련하여 크게 감소되었다. 남녀 성비는 노가 749구(48.8%)이고, 비가 788구(51.2%)이며, 이들의 나이는 壯(16~50세)이 절반 정도인 737구(47.9%)이고, 老(51세 이상)와 弱(15세 이하)은 각각 15.0%와 13.3%를 나타냈다. 노비의 결혼 양상은 부모의 신분[職役]으로 짐작할 수 있다. 부[奴]의 신분은 私奴가 395구(25.7%)이고, 奴가 151구(9.8%)이며, 班奴는 90구(5.9%)이고, 良人은 94구(6.1%)였다. 모[婢]의 신분은 班婢가 660구(42.9%)이고, 婢와 私婢가 274구(17.8%)를 차지하였다. 이들의 양천교혼은 188구(12.2%)로 다른 가문보다 낮은 비중이었으나, 여기에 반비를 포함하면 55.1%나 되어 다른 가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들의 첫 출산 나이는 주인이 평균 30.4세인데 비해 24.1세로 6년 정도 빨랐다. 노비가 많이 기재된 7점의 호적자료에서 확인된 노비 가족은 182개였다. 세대 유형별 노비 가계는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2세대형이 절반이 넘는 102세대(56.4%)이고, 형제자매의 1세대형이 65세대(35.9%)이며, 3세대형은 13세대(7.2%)이고, 4세대형은 단지 1세대에 불과하였다. 이는 노비의 가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들의 가계는 대체로 모[婢]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노비의 가족 형태는 주인의 소유방식에 따라 좌우되었는데, 424개의 결합 형태별 노비 가족 가운데 1인 가족이 226개(53.3%)로 전체의 절반 이상이었다. 이것은 당시 많은 노비가 분할 상속과 매매 등으로 해체되어 혼자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부모와 미성년 자녀로 구성된 단혼가족은 86개(20.3%)이고, 방계가족은 69개(16.3%)이며, 직계가족은 15개(3.5%)이고, 형제자매의 과도기 가족은 28개(6.6%)이다. 이들 가족이 다음 세대와 시기에 계속 지속되었는지 4개 식년자료로 확인하였다. 신계의 두 가지 준호구(1669, 1693)를 비교하면 33개의 가계 가운데 17개(51.5%)가 존속하였고, 이를 신항의 준호구(1705)를 비교한 결과 58개의 가계 가운데 16개(27.6%)가 지속되었다. 이후에는 단 하나도 존속하지 않는 등 평균 22.5%의 지속성을 보였다. 이것은 주인의 노비 소유방식과 상속관행 및 피상속자의 수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당시 노비 가족의 불안정성과 가계 지속의 취약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Abstract
The article examines the presence of slaves and their families based on the family registration data of the Pyeongsan Shin's family. The family's slaves totaled 1,538, and by the early 18th century, they owned about 200~300 slaves, but the number had decreased significantly since then to only one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Among these slaves, household slave was 385(25.0%), outside-resident slave was 734(47.4%), and fugitive slave 418(27.3%). Public slaves were significantly reduced in connection with the draft dodging due to the drudgery of Sogogun(束伍軍) in the mid-18th century amid the collapse of control and a change in the hereditary principle. The gender ratio was male slave 749(48.8%), compared with female slave of 788(51.2%), and 16 to 50 years old slaves were 737(47.9%) and slaves over 51 and under the age of 15 was 15.0% and 13.3% respectively. Slaves wedding patterns can be inferred as the identity of the parent. Among the side of father who is slave(奴), private slave was 395(25.7%), male slaves was 151(9.8%), Ban slave(班奴) was 90(5.9%), an ordinary people were 94(6.1%). Among the side of mother was a female slave(婢), Ban slave was 660(42.9%), and female slave and private slave(私婢) were 274(17.8 %). Yangcheongyohon(Their marriage rate between the common people and the lower classes) was 188(12.2%), lower than that of other households, but they were 55.1% including Ban slave. The age of their first childbirth was 6 years earlier than that of their owners' average age of 30.4. There were 182 slave families identified from the seven references that listed a lot of slaves. By generation type, a family that consists of parents and children was more than half of slave families, 102(56.4%), followed by the first generation 65(35.9%), the third generation 13(7.2%) and the fourth generation only 1. This meant that slaves’ family was unstable, whose family usually was led to matriarchal groups. Slaves’ family form depended on the way its owner had it. A family consisted of only 1 member was 226(53.3%), more than half of the 424 combined family type. This meant that many slaves at that time were separated by division of succession, dealing, resulted in living alone. The number of family consisting of parents and unmarried singles was 86(20.3%), a collateral family 69(16.3%), stem family 15(3.5%), and that of consisting of only siblings in a transition period 28(66%). It was confirmed by four year data on whether the families continued to exist in the next generation and the time. When comparing Shin Gye’s two Junhogu(准戶口, 1669․1693) 17(51.5%) out of 33 households maintained. Also, when comparing with that of Shin Hang(1705), they was lasted 16(27.6%) among 58 households. Afterwards, they didn’t exist at all, resulting in an average consistency of 22.2%. It is also a matter of ownership of the owners' slaves, the practice of inheritance and the number of inheritees, but it also shows the instability of the members of the slaves' family at the time and the fragility of the family's sustainability.
참고문헌 (32)
- 최재석, "한국가족제도사연구" (1983), 일지사
- 전형택, "조선후기 노비신분연구" (1989), 일조각
- 김용만, "조선시대 사노비연구" (1997), 집문당
-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 (2002), 일조각
- 호적대장 연구팀, "단성 호적대장 연구" (2003),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
- 문숙자, "조선시대 재산상속과 가족" (2004), 경인문화사
- 손병규, "호적, 1606-1923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의 문화사" (2007), 휴머니스트
- 진천 논실의 평산 신씨 고문서, "진천군", ~ (2015)
- 한영국, "조선중엽의 노비결혼양태(상)-1609년의 울산호적에 나타난 사례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75·76 (1977)
- 이해준, "조선후기 호서지방 한 양반가의 노비소유실태", 호서사학, 8·9 (1980)
- 이영훈, "고문서를 통해서 본 조선전기 노비의 경제적 성격", 한국사학, 9 (1987)
- 이영훈, "한국근대 경제사연구의 성과" (1989), 형설사
- 안승준, "16∼18세기 해남윤씨 가문의 토지·노비 소유실태와 경영", 청계사학, 6 (1989)
- 이영훈, "이수건교수정년기념 한국중세사논총" (2000)
- 권내현, "조선후기 호적의 작성과정에 대한 분석", 대동문화연구, 39 (2001)
- 손병규, "호적대장의 직역 기재 양상과 의미", 역사와 현실, 41 (2001)
- 손병규, "18세기 지방의 私奴軍役 파악과 운영―?慶尙道丹城縣戶籍大帳?의 기재 상황―", 韓國史學報, (13), pp.9~ (2002), 고려사학회
- 정진영, "조선후기 호적자료의 노비기재와 그 존재 양상 - 대구 경주 최씨가 소장 호적자료의 분석 -", 古文書硏究, 25, pp.103~138 (2004), 한국고문서학회
- 김건태, "조선후기 사노비 파악방식", 역사학보, (181), pp.99~129 (2004), 역사학회
- 손병규, "17·18세기 호적대장의 私奴婢 기재 실태 -경상도 단성현 권대유家 노비를 중심으로 -", 古文書硏究, 24, pp.275~308 (2004), 한국고문서학회
- 송양섭, "19세기 幼學戶의 구조와 성격-『丹城戶籍大帳』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47), pp.119~162 (2004), 대동문화연구원
- 李成妊, "조선 중기 양반관료의 ‘稱念’에 대하여", 조선시대사학보, (29), pp.47~74 (2004), 조선시대사학회
- 김경란, "조선후기 호적대장의 ‘良女’기재실태와 성격-<단성현호적대장>을 중심으로 -", 조선시대사학보, (29), pp.161~188 (2004), 조선시대사학회
- 한상권, "15세기 奴良妻交婚 정책과 교혼 실태", 古文書硏究, 29, pp.55~87 (2006), 한국고문서학회
- 문숙자, "16-17세기 兩班家 노비 가족의 존재 형태- 固城李氏 臨淸閣 分財記 분석을 통하여 -", 古文書硏究, 32, pp.147~173 (2008), 한국고문서학회[DOI]
- 김경숙, "16, 17세기 노양처병산법(奴良妻幷産法)과 노비소송", 역사와 현실, (67), pp.253~283 (2008), 한국역사연구회
- 손병규, "조선후기 상속과 가족형태의 변화 ―丹城縣에 거주하는 安東權氏 가계의 호적 및 족보 기록으로부터", 대동문화연구, (61), pp.375~404 (2008), 대동문화연구원[DOI]
- 문숙자, "18~19세기 載寧李氏家 호구단자를 통해 본 노비 家系", 藏書閣, (21), pp.105~134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DOI]
- 김건태, "戶名을 통해 본 19세기 職役과 率下奴婢", 한국사연구, (144), pp.201~238 (2009), 한국사연구회
- 김창민, "호적중초에 나타난 19세기 제주도 가족과 가구의 성격", 지방사와 지방문화, 13(2), pp.371~396 (2010), 역사문화학회[DOI]
-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單子와 準戶口의 작성과정 연구 -慶州府의 호구단자와 준호구를 중심으로-", 古文書硏究, 38, pp.155~186 (2011), 한국고문서학회[DOI]
- 김의환, "17~19세기 진천 평산 신씨의 노비 소유와 노비의 존재양상", 한국학논총, 44, pp.217~258 (2015), 한국학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