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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후 조일 국교 재개와 조명관계 (1)

Normalization of Chosun-Japan Relations after the Imjin War – Focusing on the Chosun-Ming Relationshi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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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사회학

초록

1598년 11월 노량 해전을 끝으로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하며 임진왜란이종결되었고, 1607년 1월 조선은 공식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어 1609 년 6월에는 기유약조를 통해 대마도와의 무역 관계를 회복했다. 조선과 일본의관계 정상화는 단순히 임진왜란 이전 상태로의 복귀가 아니라 17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국교 재개에 관한 연구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본 연구는 그과정을 통합적으로 다루고, 기존 연구에서 소략하게 다뤄진 부분까지도 자세히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조선과 명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즉, 조선은 명을 어떻게 활용하고자 했고, 명은 어떤 입장이었는가? 이러한관계는 조명 관계에 상당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단계별 특징을구분하여 전체 흐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도 본 연구의 목적이다. 이 논문은 국교 재개 과정의 전반부를 다루며, 후반부는 이후 논문에서 이어서 다룰 예정이다. 시기적으로는 1598년 12월부터 1603년 6월까지 약 4년 6 개월 동안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대마도는 명군 인질과 조선인 포로들을송환하며 지속적으로 강화를 요청했으나, 조선은 분명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안, 특히 강화 문제에 있어서 명의 승인을 받아야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선은 명군의 잔류를 통해 일본의 재침을 방지하고자했고, 명에게 강화 여부를 지속적으로 문의했다. 이에 대해 명은 처음부터 불관여 정책을 유지하며 사실상 조선과 일본 간의 강화에 대해 암묵적인 승인을 나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적국과의 강화가 내포하는 굴욕과 추가 요구에 대한 우려로 인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Abstract

After the Battle of Noryang in November 1598, Japanese forces withdrew from Chosun, marking the end of the Imjin War. In January 1607, Chosun sent an official diplomatic mission to Japan, and in June 1609, trade relations with Tsushima Island were restored through the Treaty of Giyu. The normalization of relations between Chosun and Japan was not merely a return to the prewar state but was instead closely linked to the shifting international order in East Asia in the 17th century. While both domestic and international studies on the re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have been abundant, this study aims to provide a comprehensive analysis of the process, including aspects that have been treated only briefly in previous research. In particular, this study focuses on the Chosun-Ming relationship during the normalization process. Specifically, it examines how Chosun sought to make use of the close relationship with Ming and what Ming’s stance was. This dynamic reveals significant changes within the Chosun-Ming relationship, and identifying the characteristics of each phase can enhance our understanding of the overall progression. This paper covers the initial phase of the process of restoring diplomatic relations, while the latter phase will be examined in a subsequent paper. Chronologically, it focuses on the period from December 1598 to June 1603, spanning about four years and six months. During this time, Tsushima continued to repatriate Ming military hostages and Korean prisoners while repeatedly requesting peace talk, but Chosun refrained from giving a definitive response. The primary reason was Chosun’s need to obtain Ming’s approval on all matters, especially regarding peace negotiations. Chosun aimed to prevent a Japanese reinvasion by the presence of Ming forces and continuously consulted with Ming regarding the peace talk. From the outset, however, Ming maintained a policy of non-involvement, implicitly allowing for a peace agreement between Chosun and Japan. Nevertheless, Chosun responded cautiously, concerned about the humiliation and potential additional demands that might arise from making peace with a former en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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