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 집돌이농악과 지방 관아 나례희의 관련 양상
The Relating Aspects of the NewYear Days Visiting HousesNongak and LocalGovernmentOfficeNaryehŭ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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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 집돌이농악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부여에서 은력(殷曆) 정월에 ‘영고(迎鼓)’라는 국중대회를 가졌듯, 한 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정초의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과 관련해서 상고시대부터 있었던 우리 민족의 종교 의례와 일정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승되는 정초 집돌이농악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적어도 고려 정종 6년(1040)에 중국의 나례(儺禮)가 들어온 이래 고려시대부터 행해진 지방 관아의 나례희의 영향이 크다. 나례란 것이 잡귀잡신들이 무서워하는 가면을 쓴 나례신들을 앞세우고 타악기들을 두들기는 것이기에, 이러한 나례신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농악의 잡색들이 될 수 있고, 타악기를 두들기며 하는 이러한 의식이 흔히 ‘매구’라고 하는 정초 집돌이농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흔히 ‘매구’라고 하는 연말 나례 의식을 일반 서민들도 오늘날과 달리 말 그대로 연말 곧 섣달 그믐날에 하였다. 오히려 관아에 악공으로 있던 광대들이 섣달 그믐날에는 관아에서 나례희를 하고 정초에 들어서는 민간을 돌며 역시 ‘매구’라 하며 그러한 관아에서의 나례희와 비슷한 의식을 민간의 집돌을 돌며 하였다. 이런 면에서 정초의 흔히 ‘매구’라고 하는 정초 집돌이농악은 광대들에 의해 선도(先導)된 면이 있다. 전통사회에서 지방 관아에 악공 또는 군악대로 있던 광대들이 섣달 그믐날 지방 관아에서 나례희를 하고, 정초가 되면 이의 연장으로 민간을 돌며 이른바 광대들의 정초 집돌이농악을 한 것은 일정한 수입을 잡기 위함이었다. 정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해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종교적 마음을 갖기에 그와 같은 일종의 정초의 종교 의례를 해 주면 사람들이 그 사례로 전곡(錢穀)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물론 전곡을 내놓을 만한 부잣집들만 돌았다. 이렇게 적어도 고려 말부터 지방 관아에서 나례희를 하고 정초가 되면 이의 연장으로 광대들이 민간을 돌며 이른바 정초 집돌이농악을 하게 되자, 고려시대부터 이미 섣달 그믐날 관아의 나례희에 비견되는 민간의 나례희를 하고 있었고, 마을에서 종교적 축원이나 김매기 같은 두레에서 이미 일정한 농악도 사용하고 있던 일반 사람들도 점차 광대들의 그러한 정초 집돌이농악을 흉내 내여 그들의 정초 집돌이농악을 하게 된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광대집단 사람들로서 농악을 치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기에 이들 일반인들이 하는 정초 집돌이농악만 남아 있다. 정초 집돌이농악의 유래는 이른바 상고시대에까지 올라갈 수 있기에 고려시대 이래의 지방 관아의 나례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실들을 고려하면 오늘날의 정초 집돌이농악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지방 관아의 나례희와 이의 연장으로 이뤄진 정초 광대들의 민간의 집돌이 의식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성립된 것도 또한 분명한 사실인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정초 집돌이농악을 전국에 걸처 흔히 구나적(驅儺的) 명칭인 ‘매구(魅驅, 埋鬼)’라고 하는 점이다. 이는 적어도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전국에 걸쳐 지방 관아에서 매년 연말 나례희가 이뤄졌고, 이의 연장으로 정초가 되면 역시 전국적으로 광대들이 정초 집돌이농악을 하여 왔기 때문이다. 둘째, 농악의 잡색들인 대포수, 양반, 각시 등이 모두 나례의 나례신(儺禮神) 계통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양반과 각시는 중국의 나례신인 판관과 소매(小梅)에서 나올 수 있고, 포수도 총을 쏘아 잡귀잡신을 쫓는다는 점에서 역시 구나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셋째, 광대들의 이른바 정초 집돌이농악의 실제 목적이 전곡을 받아내는 것 곧 ‘걸립’이듯이 일반 사람들의 정초 집돌이농악 계통의 농악도 흔히 ‘걸립’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넷째, 나례가 원래 군례(軍禮)이어서 그런지 정초 집돌이농악에는 조선 후기에 발달된 군악적 요소들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적어도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이뤄진 지방 관아의 나례희와 이의 연장으로 이뤄진 정초 민간에서의 광대들의 정초 집돌이농악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실상 오늘날 전승되는 정초 집돌이농악이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논의에 앞서 이러한 정초의 광대들의 활동이 민간에서 수용되기 위해서는 이것을 받아들일 만한 정초에 우리 민족이 가지는 종교적 심성이 당연히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정초 집돌이농악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다룬 지방 관아의 나례희적 요소 외에도 역시 정초 집돌이농악 때 중요하게 이뤄지는 정초의 성주고사 등과 같은 풍요기원 의식, 조선시대 상당수의 마을들에 있었던 정초의 유교적 동제(洞祭)와 관련된 농악걸립 행사 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단지 정초 집돌이농악의 해명에 중요한 한 요소인 지방 관아의 나례희적 요소를 다뤘을 뿐이다. 우리나라 정초 집돌이농악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보다 전반적인 논의가 있어야 한다.
Abstract
New year days visiting houses nongak 農樂(the following is new year nongak) is one of religious rite at new days that is relating to religious mind of the Korean people at those days. So to speak, Korean people has prayed well-being and prosperity of the year at least from the nation of Puyŏ 扶餘that held religious festival at January. But today new year nongak had been affected very much by the local government office narye 儺禮that generally came from China at the 6th year of king Chŏngjong 靖宗in Koryŏ dynasty. Narye was the ceremony that made the gods expelling evils go ahead and hit percussion instruments. So the gods of narye could become nongak’s chapsaek 雜色and the hitting percussion instruments could become nongak percussion so called ‘maegu’ 魅驅. Kwangdae 廣大(jesters) that were belonged to local government offices as musicians (including barracks bands) did naryehŭi 儺禮戱at local government office at the last day of the year night and did new year nongak so called maegu at civil rich people houses in the new year days. The people who had the religious mind just like hoping well-being and prosperity generally gave them grains and money as reward for that event. There were local government office naryehŭi and kwangdae’s so called new year nongak since Koryŏ dynasty, so ordinary people already equipped with nongak just like ture 두레 nongak hold civil naryehŭi comparable to the local government’s one at the last day of the year night and did new year nongak mimicking the kwangdae’s one since Koryŏ dynasty too. New year nongak already had a sort of form before the coming of the narye in the Koryŏ period and had several elements that could not be explained only by local government office naryehŭi. But there were conspicuous several aspects that nationwide new year nongak title was maegu derived from narye, the nongak chapsaeks – taep'osu 大砲手, yangban 兩班, and kaksi 각시 etc. - derived from narye gods,the elements of the military band specially developed very much in the late Chosŏn dynasty remained at today ordinary people new year nongak as originally narye was the ceremony of military, and ordinary people used the performance of new year nongak in the purpose of getting grains and money kŏllip 乞粒at non new year days because like the kwangdae’s the real purpose of so called new year nongak was kŏllip. When we consider these aspects, it is reasonable that new year nongak was affected by the kwangdae’s new year days visiting civil houses ceremony that was the extension of local government office naryehŭi. Today new year nongak almost could be explained by the local government office naryehŭi that started at Koryŏ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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