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下 群山府 華僑의 存在形態와 活動樣相
日帝下朝鲜群山府华侨的存在形态及活动情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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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群山은 黃海를 가운데 두고 중국과 접해 있는 한국 서해안의 항구 도시이다. 이 도시는 조선 후기 錦江 河口의 대표적인 浦口였던 江景浦에 딸려 있는 小浦口였다. 이후 군산은 대한제국 정부의조치로 1899년 5월에 개항되었고 '쌀의 군산' 이라고 불릴 정도로 호남평야의 미곡이 輸移出되었던개항장 도시로 성장하였다. 또한 군산은 서해안에 접해 있을뿐더러 인천에 근접한 까닭에 화교들의 이주도 두드러졌다. 비록 그 숫자가 여타 도시의 화교들에 비해 적을지라도 군산이 일제 강점기에 미곡 수이출항으로 발전하여 상업도시로 성장하였음을 고려한다면 화교들의 활동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99년 군산이 개항되고 淸日戰爭의 후유증이 사라지면서 仁川 등 인근 개항장이나 산둥 지역의 화교들이 이곳에도 이주해 왔다. 이들은 개항 직후부터 다른 개항장과 달리 租界地의 일부 지구를 확보하여 상점들을 개점하였고 대중국 무역의 활성화에 힘입어 商權을 신장시켜 갔다. 비록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과 1914년 각국 조계지의 폐지로 화교 인구가 줄어들고 무역 규모가위축되었지만 이후 대중국 무역액의 증가에 힘입어 화교 상인들은 증가하였다. 종사 업종도 綿織物,中國 麻布 및 일용 잡화의 판매업에 그치지 않고 농업, 공업 분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일부 직물판매상과 잡화상 등은 상당한 영업 실적을 올렸다. 이는 다시 화교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면서 군산부에서 차지하는 화교의 위치가 높아졌다. 1924년에는 仁川商務公會의 分會가 설치되었으며 1927년에는 群山中華商會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일제가 자국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關稅法을 여러 차례 개정하여 중국산 상품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면서 대중국 무역 규모가 줄어들고 화교의 商權도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31년 완바오산(萬寶山) 事件과 만저우(滿洲) 事變 등이 일어나자 군산부 화교들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본국으로 급거 귀국하기 시작하였고 대중국 무역도 침체 국면에 들어갔다. 반면에 군산부 일본인들은 당시 본국의 米穀統制法으로 米穀 移出이 어려워진 가운데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전개하였다. 특히 1937년 中日戰爭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산뚱 지역을 침략하자 군산부 일본인들은 이런 국면에 편승하여 미곡을 비롯한 각종 상품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한편, 中日戰爭이 격화되고 화교 상업이 위축되면서 군산부의 일부 소수 화교들은 화교단체의중심이라 할 中華商會의 지침에 따라 여타 화교 단체들과 더불어 일제에게 적극 협력하고자 하였다. 이에 화교 농민들을 비롯한 군산부의 자주파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화상회 간부진의 친일 협력 활동을 적극 반대하여 나갔다. 그 결과 군산부 화교 사회는 분열되어 학교 설립을 비롯한 여러 사안에서많은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자주파 화교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화교 사회를 다시 정상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Abstract
群山是一座与中国隔黄海相望的海滨城市。在朝鲜后期,这座城市曾经是附属于锦江河口最有代表性的浦口之一"江景"的小浦口。之后,因利于大韩帝国政府采取的措施,群山于1899年5月开埠,并发展成为"米的群山",是输移出于湖南平野里米谷的商埠。群山不仅濒临黄海,而且与仁川距离较近,所以吸引了许多华侨移民到这座城市。虽然这个数目与其他城市相比较小,倘若我们考虑到群山在日帝强占期会发展成为输移出米谷的商业城市这一点,也需要把眼光集中在华侨活动方面。自1899年始,由于群山的开埠及中日战争后遗症的消失,华侨纷纷从仁川等附近商埠及山东地区移民到群山。从开埠开始,他们与其他商埠不一样,用占有租界地的方式来开商店,而且利于对中贸易的活跃,提高了自身的商权。因为日帝在1910年强占大韩帝国,并在1914年废止了各国的租界地,所以不但华侨人口数目减少了,华侨贸易规模也随后缩小了。之后,因对中贸易额的增加,华侨商人数也有所增长。他们从事的行业也不再局限于锦织物,中国麻布及日用杂货品,而是逐步扩大到了农业及工业。因此一部分经营织物及杂货贸易的商人取得了相当大的利润。这种情况引起了华侨人口数目的增长,由此,群山府华侨的地位也随之提高了。1924年,仁川商务公会的分会设立, 1927年群山中华商会也建立了。但是在1920年,为了提高本国产品的竞争力,日本帝国修改了几次《关税法》,借以降低中国产品的竞争力。因此,不但减少了对中贸易,华侨的商权也随之开始消弱。尤其在万宝山事件和满洲事件发生之后,与其他地区的华侨一样,群山府华侨也开始迅速回国。由此对中贸易也陷入了停滞局面。与此相反,当时群山府的日本人因本国的《米谷统制法》而难以输出米谷,为了打破这样的局面,群山府的日本人做出了多方面的努力。尤其在1937年中日战争爆发之后,日本军队侵略了山东地区。趁着这样的局面,群山府的日本人把包括米谷在内的各种商品输出到中国。另一方面,随着中日战争的进一步加剧,华侨的商业范围也随之缩小,部分群山府华侨接受了可以算是华侨团体核心的"中华商会"提出的建议,想要与其他华侨团体协作,积极地与日本合作。与此相反的是,以华侨农民和群山府自主的华侨为中心,对"中华商会"的干部进行了激烈的反抗。因此群山府华侨社区逐渐分裂,对包括设立学校在内的各种活动都发生了分歧。但是由于自主华侨的努力, 1945年8月日帝败亡后,群山府华侨获得了重新将华侨社区正常化的机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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