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太祖王代 對後漢 관계의 動因과 전개
Motivation and Development of the Relations with the Hou Han in the Period of King Taejo of Gogu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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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고의 목적은 고구려 태조왕 시기를 중심으로 전개된 對後漢 관계 양상을 살펴보고, 動因을 검토하는 데 있다. 그 動因은 크게 內因과 外因으로 구분하였다. 고구려의 후한 북변 4군 공격을 계기로 兩國은 恩信을 성립하게 되었다. 恩信은 『後漢書』에 있는 그대로의 표현이고, 49~105년 사이 고구려와 후한의 관계를 설명하는 열쇠로 판단된다. 따라서 은신의 용례를 분석하고, 고구려의 상황에 대입시켜 보았다. 『後漢書』의 정보를 종합하면, 최소 59년 무렵까지 양국 관계는 평온했던 듯하다. 이때를 틈타 고구려는 56년(太祖王 4) 동옥저를 비롯하여 갈사국ㆍ조나ㆍ주나 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부여의 방물을 받는 한편으로, 책성을 ‘巡’하고 安撫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은신 관계는 69년(太祖王 17: 永平 12) 요동태수 채융의 이직을 계기로 점점 쇠퇴한 듯하다. 사실 은신은 다양한 사례를 살펴보면, 특정 개인의 능력에 의지하는 면이 크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후한의 군사력 부족과 상대 거점이 險阻하다는 점 등 근본적 한계를 갖기도 하였다. 특히 97년(永元 9) 요동태수 祭參이 선비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下獄死한 사건은 은신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였다. 후한 조정은 변군의 관리를 임용할 때, 변경 지역 출신이나 豪族 중에 주변 민족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인물, 또는 가문의 혈연관계를 주된 요인으로 삼았다. 채참은 채융의 아들인 만큼 은신 회복이라는 목적을 갖고 요동태수로 부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아울러 이때를 기점으로 선비ㆍ오환ㆍ남흉노 등이 성장하여, 차츰 후한의 북변을 공격하고 있었다. 105년(太祖王 53ㆍ元興 元) 고구려는 요동의 6현을 공격하였다. 공격 배경에는 은신의 소멸과 함께 胡族 세력의 군사 활동을 들 수 있다. 이 공격은 요동태수 경기의 반격으로 실패했고, 고구려는 109년ㆍ111년 두 차례에 걸쳐 후한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같은 시기 선비ㆍ오환ㆍ남흉노 등도 후한 공격에 실패하거나, 도리어 화친하는 사례가 보인다. 후한이 변경에 적절한 대처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고, 고구려는 방향을 바꾸어 南海 순수나 華麗城 공격에 나선 것으로 추측된다. 121년(太祖王 69: 建光 元) 내내 걸친 양국의 전투는 다시 후한의 변군을 공격한 胡族 세력의 동향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는 對後漢 관계를 단독 또는 胡族 세력과의 연합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한 것이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aspect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ou Han, which developed around the time of King Taejo of Goguryo, and to examine the movement. The movement was largely divided into internal and external. With Goguryo's generous attack on the four northern Commanderes, the two countries established a military alliance. favor and faith(恩信) is an expression as it is in the Hou Han Shu(後漢書), and is believed to be the key to explai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Goguryo and Hou Han between 49 and 105. Therefore, we analyzed the use cases of favor and faith and substituted them into the situation of Goguryo. Putting together Hou Han Shu's information,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seem to have been calm until at least 59 years ago. Taking advantage of this time, Goguryo occupied Dongokjeo and other small countries around it in 56. And while receiving the property of Buyeo, he was carrying out activities such as pure and consoling the responsibility. Meanwhile, the favor and faith relationship seems to have gradually declined in 69 with the turnover of Liaodong Viceroy(遼東太守) Zhai Rong(祭肜). In fact, when looking at various cases, favor and faith was characterized by a large dependence on a specific individual's ability. In addition, it also had fundamental limitations, such as the lack of military power in Hou Han and the fact that the other base was good. In particular, in 97, Liaodong Viceroy Zhai Can(祭參) failing to prevent the attack of the scholar and dying in prison meant the complete extinction of favor and faith. When appointing an official of the border army, the generous court used the blood relationship of a person from the border area or a person who had experience dealing with the surrounding people, or the family as the main factor. As Zhai Can was Zhai Rong's son, he was appointed as a Liaodong Viceroy for the purpose of recovering from favor and faith, but eventually failed. In addition, starting from this time, Xianbei(鮮卑), Wuhuan(烏桓), and South Xiongnu(南匈奴), gradually attacking the northern side of the Hou Han. In 105, Goguryo attacked the six prefectures of Liaodong. The background of the attack is the disappearance of favor and faith and the military activities of the Barbarian Forces(胡族 勢力). This attack failed due to the counterattack of the Liaodong Viceroy Geng Kui(耿夔), and Goguryo dispatched envoys to Hou han twice in 109 and 111. At the same time, there are cases in which Xianbei, Wuhuan, and South Xiongnu fail to attack generously or rather become close friends. It is presumed that Goguryo changed its direction and launched an attack on Pureun or HuaLi Fortress(華麗城) in the South Sea(南海), seeing that Hou Han was taking appropriate measures against the border. The battle between the two countries throughout 121 years can be understood in connection with the trend of the Barbarian Forces that attacked the border forces of Hou Han again. Goguryo developed relations with China in various ways, such as alone or in union with the Barbarian Fo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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