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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宗 元年(1650) 龍洲 趙絅의 白馬山城 幽囚

Yongju(龍洲) Jo Gyeong(趙絅)’s Imprisonment to Baekma(白馬) fortress in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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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기타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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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龍洲 趙絅이 효종 원년(1650) 白馬山城에 幽囚된 배경과 경위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먼저 조경이 주장한 척화론의 내용과 특징을 검토하였다. 그의 척화론은 국가의 존망을 가리지 말고 對明義理를 고수해야 한다는 당대의 일반적 주장과 맥이 닿아 있었다. 이어서, 효종 원년 청의 査問勅使 파견과 조․청 간의 여러 외교적 현안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예조 판서를 역임하였던 조경은 결국 吊祭謝恩의 失禮와 관련된 사안에 대하여 영의정 李景奭과 함께 최종 책임을 지고 사형을 언도받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의 적극적 구명 활동에 의하여 감형되어 이경석과 함께 백마산성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야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조경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안겨주었지만, 또 한편 反淸 인사로서 명성을 떨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o the background and history of Yongju(龍洲) Jo Gyeong(趙絅)’ Imprisonment to Baekma(白馬) fortress in 1650. First, it reviewed the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Jo Gyeong’s Cheok’hwa-ron(斥和論). His argument is similar to the prevailing arguments of the day that we should adhere to Dae’myeong Euiri(對明義理, stance of maintaining loyalty to the late Ming dynasty) without regard to the survival of the state. Next, it reviewed Qing’s dispatch imperial envoy of investigation(查問勅使) in 1650 and various diplomatic issues between Joseon and Qing. Jo Gyeong, who served as the Minister of Culture and Education, along with the Chief State Councilor Lee Gyeong seok(李景奭) eventually took the final responsibility for impoliteness related to condolence and appreciation(吊祭謝恩) and was in danger of being sentenced to death. However, he was commuted by active rescue activities of King Hyojong(孝宗) and exiled to Baekma(白馬) fortress together with Lee Gyeong seok, and was released only the following year. This incident gave Jo Gyeong an unbelievable hardship, but also became a chance to shine up his reputation as an anti-Q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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