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전통’으로서의 同姓同本禁婚制와 식민정치
The Ban on Same-Surname-Same-Origin Marriage as an ‘Invented Tradition’ and Colonial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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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논문에서는 식민지시기 조선총독부의 가족법 개정 시도와 그에 대한 조선인들의 대응 과정에서 동성동본금혼제가 어떻게 조선의 ‘미풍양속’으로서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하였다. 1912년 일제에 의해 도입된 조선민사령으로 동성동본금혼 관행은 근대법 체제 하에서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관습’으로서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1923년 법률혼주의의 도입으로 동성동본혼자는 혼인신고와 자녀의 출생신고를 할 수 없게 됨으로써 실제적인 법적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동성동본혼자의 출현으로 법적 혼란이 야기된다는 명분 아래 1920년대부터 동성동본금혼제의 변경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사실혼 및 사생자의 발생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이러한 법 개정 시도는 조선의 가족・친족제도를 개편하여 일본식 씨제도를 도입한다는 일제의 동화주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시도는 많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혈족결혼(근친결혼)’의 도입으로 간주되었고, 반발을 낳았다. 우생학・유전학적 지식의 보급으로 ‘혈족결혼’이 ‘열성자손’을 낳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조선의 동성동본금혼제가 오히려 일본의 혈족결혼보다 우월한 ‘美風良俗’이라는 시각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가족개혁을 지향하며 동성동본금혼제를 현실에 맞지 않는 ‘陋習’으로 간주하고 그 개정을 긍정하는 조선인들도 있었지만, 결국 법 개정을 주도했던 일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발 속에서 이러한 목소리는 힘을 얻지 못하였다. 1939년 서양자와 창씨개명 등 조선의 관습과는 이질적인 일본식 가족제도를 조선에 강제로 이식하고자 했던 일제는 그간의 동성동본금혼제 개정시도를 포기하고 ‘조선의 관습이라도 순풍미속이면 인정한다’는 취지 하에 이를 존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조선인의 반발을 무마하고 내선일체가 일본의 문화적 정복으로 비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동성동본금혼제는 동화주의정책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발을 막는 완충제로서 조선의 ‘미풍양속’으로서 굳건하게 자리매김 되기에 이른다. ‘민족적 전통’으로서의 동성동본금혼제의 출현에는 이처럼 조선시대 이래의 종법주의적 가부장제의 역사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근대주의가 교차하였던 일제하의 식민정치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다.
Abstract
In dealing with the case of the Korean family law revision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and Korea's reaction to it, I analyzed how the ban on same-surname-same- origin marriage could be recognized as Korea's 'fine custom'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ban became applicable to all Korean people, regardless of their status under the newly modernized colonial law system. The Colonial Government, however, began to carry forward an amendment to this ban from the 1920s onwards. Though claiming to prevent legal confusion caused by the ban on same-surname-same-origin marriage, such as a rise in the number of de facto marriages and illegitimate children, the ultimate goal of this amendment was to introduce the Japanese family system to Korea thus changing the Korean family system through the colonial power's assimilation policy. This trial caused resistance among Koreans who regarded the amendment of the ban as a gateway into the established Japanese practice of 'marriage to close relatives'. Thanks to the rapidly growing interest and research into eugenics and genetics, marriage between close relatives was already being universally criticized as the cause of 'inferior descendants'. Many Koreans thought their marriage laws were superior to the Japanese marriage system and 'fine custom'. Other Koreans, pursuing reform of the Korean traditional family, criticized the ban as a 'bad custom' and affirmed the Japanese amendment to the law. However, their voice was always that of a very small minority during a time of rising national resistance. Despite the rising dissidence, in 1939 the colonial government enforced the Japanese family system-including, the adopted son-in-law system and the obligation for Korean people to change their names to Japanese ones. Through this course of action, the colonial power actually gave up revision of the ban and decided to maintain Korea's 'fine custom'. By doing this the colonial government's intention was to put down the Korean dissidents who wanted to prevent Naeseon Ilche-the Japanese assimilation policy. Ironically, by accepting Korea's ban on the same-surname-same- origin law, the Japanese cultural conquest could be completed. With the acceptance of the ban, the Korean traditional marriage law became a 'fine custom' and a buffer to reduce national animosity toward the assimilation policy. The appearance of this ban as a 'national tradition' was due not only to the Chosŏn dynasty's patriarchal history, but also to the effect of colonial politics at a point where colonialism, nationalism and modernism inters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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