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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宗元先友看唐后期士族及其文化的先特征

柳宗元의 先友記에 보이는 唐 後期 士族과 그 文化의 선진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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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唐人魏征在撰寫隋書之際,曾經引用古語雲:“容體不足觀,勇力不足恃,族姓不足道,先祖不足稱。然而顯聞四方,流聲後胤者,其唯學乎?信哉斯言也。”應該說,這種認識論適用於中國曆史發展的全過程。唐後期士族後裔在社會上的影響與所獲得的成功無不與士族文化密切相關。他們的成功就在於現實社會中沒有一個可以取代士族門風禮法、並被社會所認可的道德規範,這也是那些雖然不乏累世高官的家族,卻最終不能成爲士族的關鍵所在。縱觀唐代三百年的曆史發展,唐代士族在血緣上雖然與魏晉士族一脈相承,但是,曆史的進步讓他們告別了依靠門第即可“坐致公卿”的過去;也是曆史的進步,敦促他們將士族文化中的精華部分繼續發揚光大。唐後期在仕途上取得成就的士族是士族後裔中的優秀分子,他們在才學與道德兩個方面都表現岀很高的修養,對唐後期士風日下的頹廢形勢,產生了重要的正面價值導向作用,並對此後的曆代王朝依然產生著積極的影響。導致士族退出曆史舞台的原因,不是因爲他們破落無爲,也不是因爲他們離開了享有郡望的鄉裏社會,更不是因爲他們從原來的地方豪族演變成爲城市官僚,而是因爲士族所賴以生存的唐帝國壽終正寢,尤其是隨之而來長達半個世紀之久的動蕩局面,導致整個社會政治以及生存環境發生了重大的變更。如果說“十年浩劫”即可毀掉幾代人的話,那麼從唐末黃巢起義(875年)開始到北宋建立(960年)長達八十五年之久的社會動亂,則完全可以制造岀一片文化沙漠。士族階層及其文化正是在這個曆史時期出現了巨大的斷裂,並喪失了再次修複的可能。

Abstract

일찍부터 학술계에서는 당대에 사족은 세력이 몰락해버린 계층의 상징이고 당조의 사족은 위진의 사족제도가 남긴 잔재로 존재하였을 뿐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혹자는 당말에 사족이 다시 중앙정부의 주요 지위를 차지한 것은 죽기 직전에 나타나는 일종의 회광반조 현상일 뿐이라고 인식한다. 본문은 이와는 다른 입장에서 작성되었다. 우선 유종원의 先君石表陰先友記의 사료 내용을 통해 그 안에 기재된 유종원의 부친 유진생이 생전에 교유하던 사인 67명의 문화 배경과 사회 지위를 분석․고찰하여, 이들이 사족과 서족이 합류한 문인단체였고 그들 중 주도적인 인물들의 지위는 육조시대 사인의 후예임을 지적했다. 다음으로 본문에서 사족과 서족이 합류하는 문화적 배경을 논증하고, 사족과 서족의 합류에서 과거제가 중요한 작용을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과거제는 일종의 계기였을 뿐이고 사족과 서족이 합류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반드시 양자간 문화 교류와 가치관이 서로 접근했을 때에만 최종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그중 가치관이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 문화 교류의 가장 중요한 전제였다. 마지막으로 당초 이래 몇차례에 걸쳐 譜牒의 기록이 수정되었는데, 그 목적은 옛 사족의 사회적 영향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지만 이러한 수단은 최종적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밝혔다. 보첩의 수정이 적지 않은 새로운 顯貴들을 만들어냈지만 당대 역사 전체를 보면 시종일관 사회적으로 승인받은 것은 전통적 문화의 가치를 견지한 사족의 후예였다. 당대의 사족은 혈연적으로 위진의 사족과 일맥상통하지만 역사가 발전함에 따라 가문의 등급에 따라 “저절로 公卿이 될 수 있던” 과거와는 달라졌다. 또한 역사가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사족 문화의 정수를 계승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당 후기에 사족이 정치무대에서 활약한 것은 정치 사회면에서 사족 문화가 성공하였다는 일종의 증명이다. 당 후기의 역사 발전을 보면 사족문화는 응집력이 강하고 정통적 가치관을 대표하는 선진 문화였다.

참고문헌 (1)

  1. "『鉗?Z주叫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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