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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덕왕대 균전적(均田的) 토지제의 시행과 체제정비

A study on Enforcement of Gyunjeonje(均田制) and Improvement of Governance in the reign of King Seongdeok(聖德王) of Silla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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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대 이후 효소왕대까지 계속되는 중앙집권적정책 속에서 귀족세력의 반발은상대적으로 두드러졌다. 특히 귀족세력 내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 균열의 모습도 배태되고 있었다. 益善 아간의 사건이나 鄭恭의 반발은 그러한 정치적 대립의 결과로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정공의 반발은 이찬 경영이 모반을 꾀할 만큼 위기의식에 따른 것이며, 그 사건과 관련이 있던 중시 順元이 파면되었다. 하지만 효소왕과 지지세력이 의도하던 대로 정치 질서 재편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모량리를 중심으로 소외되어 있던 귀족세력은 동모제인 성덕왕과 연계하여 생존을 모색하였고 성덕왕 즉위 후 신라 귀족사회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연좌되었던 순원이 성덕왕에게 納妃하며 國舅로서 화려하게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등 귀족 세력은 성덕왕 즉위후전반기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성덕왕은 대일 외교를 중시하던 김순정, 김원태 세력을 약화시키며 왕권을강화하였고, 진여원의 개창을 통해서는 의상계 화엄사상의 부활을,『지지』편찬 등을 통해서는 지방통제의 강화를, 금살령과 백관잠의 반포를 통해서는 群臣질서를, 유교문화의 확산을 통해서는 친왕적 관료군 형성을, 전사서의 설치를 통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집권력을 강화시키던 성덕왕은 麗濟의 故地였던 한산주와 발해 접경지인 패강 유역에 대해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평야지대라는 지리적 특징에 주목하여 농업 생산력 확보를 통한 국가 재정의 안정을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이 지역과 연고되어 있으나 삼국통일 이후 정치적으로 위축되어 있던 김유신 가문을 정치적으로 우대· 등용하여 북방 정책의 선봉에 서게 하였는데 윤중의 中侍 임명 등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발해 견제를 통해서는 당으로부터 실리를 취하는 외교정책을 전개하여 수준 높은 외교력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패강 지역의 실질적 확보를 통해 안정적인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당의 균전제를 모방한 丁田制를 시행하였다. 진전된 대민 지배로서 신문왕대 녹읍혁파 이후의 토지 지급여력을 활용한 조치였다. 정치적 안정을 확보한 성덕왕은 추가적 조치를 단행하였다. 균전적 성격이 강한 丁田의 지급으로서, 이미 주변국인 唐과 日本은 이미 균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정전 시행이 용이한 패강 지역에서 먼저 지급되었고 이후 단계적으로 확대되어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이는 녹읍 폐지 이후 확보된 토지가 지급 여력을 뒷받침하였고, 패강 유역에서 시행상의 문제점을 파악하였기에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정전 지급 이후 기근 등 재해 기록이 보이지 않음은 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바탕위에서부병제가 시행되기에 이른 것이고 김암의 활동은 이를 증명한 사례였다. 곧 성덕왕은 정전지급을 통해 균전제를 시행하고 나아가 부병제까지 의도한 것으로 관념적인 왕토사상을 실질적으로 현실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안정된 중앙집권적 관료정치의 실현을 통한 전제적 체제를 염원한 것이다.

Abstract

神文王代 以後 孝昭王代まで 継続になる 中央集権的政策の中で 貴族勢力の反撥は 相対的に著しかった. 特히 貴族勢力 内で 自身らの 利害関係によって 政治的 対立の模襲も 胚胎になっていた. 益善 阿干の事件や 鄭恭の反撥はそういう 政治的 対立の結果として起きた 事件だった. 鄭恭の反撥は 이 慶永が 謀叛をはかるほど 危機意識によることであり, その事件と関連があった 中侍 順元が 罷兔になった. しかし 孝昭王と支持勢力が 意図した大道 政治秩序 再編が成り立たなかった. 牟粱里を 中心に 疎外になっていた 貴族勢力は 同母弟である 聖徳王と 連繋して 生存を 摸索したし 聖徳王 即位 後 新羅 貴族社会を 主導する 位置に上がるようになった. 連坐になった 順元が 聖徳王に 納妃して 国舅として 華麗するように 政治的に 再起するなど 貴族勢力は 聖徳王 即位 後 前半期 政局を主導した. しかし 聖徳王は 対日外交を 重視した 金順貞, 金元泰 勢力を 弱化させて 王権を 強化したし, 真如院の改創を通じて 義湘系 華厳思想の復活を,『地誌』編纂 等を 通しては 地方統制の強化を, 禁殺令と 百官箴の頒布を 通しては 君臣秩序を, 儒教文化の 拡散を 通しては 親王的 官僚群形成を, 典祀署の 設置を 通しては 強力一 中央集権を 具現しようとした. 執権力を 強化させた 聖徳王は 麗済の 故地だった 漢山州と 渤海接境地である 浿江流域に 対日 北方 政策を 推進した. これは 平野地帯という 地理的 特徴に 注目して 農業生産力 確保を 通一 国家財政の安定を 為한 目的で成り立った. これを 為緩み 地域と 縁故になっているが 三国統一 以後 政治的に 弱化になった 金庾信家門を政治的に 優待して 北方政策の先鋒に立てたが 允中の 中侍任命は 象徴的 事件だった. この時期の渤海牽制を 通しては 浿江以南の支配権を 認定受けるなど 唐から 実利を 取する 外交政策を 展開して 水準 高い 外交力を見せてくれた. ひいては 浿江地域の実質的 確保を通한 安定的である 経済的 土臺を用意しようと 唐の均田制を 模倣한 丁田制を 施行した. 進展になった 対民支配として 禄邑が 革罷になった 以後の土地支給余力を 活用一 措置だった. 政治的 安定を 確保を 聖徳王は 追加的 措置を 施行した. 均田的 性格が 強一 丁田の支給として, もう 周辺国である 唐と日本は 均田制を 運営とあった. 優先的に 丁田施行が 容易한 浿江地域で先に 支給になったし 以後 段階的に 拡大になって 全国的に 施行した. これは 禄邑廃止 以後 確保になった 土地が 支給余力を裏付けたし, 浿江流域で 施行上の問題点を 把握したから 效率的に 機能できた.丁田支給 以後 饑饉 等 災害記録が 史料上に現われないことはこれを 反映する. このような 土台の上で 府兵制が 施行になるのに至ったし 金巌の 活動はこれを 証明一 事例だった. 即 聖徳王は 丁田支給を通じて 均田制を 施行とひいては 府兵制まで 意図したことで 観念的である 王土思想を 実質的に 現実世界で 具現しようとしたし, 窮極的では 安定になった 中央集権的 官僚政治の実現を通じる 専制的 体制を 念願した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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