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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敾의 身分과 仕宦 履歷 -사대부 출신 및 도화서 화원 진출 여부-

A Study on the Status and the Official Career of Cheong Seon(鄭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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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본고에서는 정선의 신분과 도화서 화원 경력 여부, 그리고 그의 신분과 예술적인 성과의 상관관계 등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정선의 가계는 중인 가계라고 볼 수 없었다. 정선이 속한 가계에서는 잡과와 주학 입격자나 기술직 종사자를 배출하지 않았으며, 이들 가계 구성원들이 다른 중인 가계 구성원들과 혼인한 사례도 없었다. 정선의 가계는 양반 庶流 가계도 아니었다. 광주 정씨의 가계기록과 정선 직계 배우자들이 소속된 각 가계의 가계기록을 통해서, 정선의 父系 직계 先祖들과, 고조모, 증조모, 母, 그리고 정선의 둘째 사위 등이 모두 양반 적자녀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가계 기록 중에는 18세기 중반에 간행하였거나, 고종 연간에 정부에서 간행한 『선원속보』도 있으므로, 정선의 신분은 양반 적손이라고 판단하여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承旨 尹敬龍이 영조에게 정선의 신분이 사대부라고 언급한 말은 사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 이유는 윤경룡이 승지로써 당시 官界 인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여지가 많았고, 특히 정선과 의금부에서 都事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어서 정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대부는 당시에 중인이나 양반 庶流와 구별되는 신분 곧 양반 嫡孫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윤경룡의 진술은 정선이 사대부임을 확실하게 해 준다. 숙종 연간에 도화서 화원에 임명된 자들 중에 상당수가 신분이 중인으로 판명되었다. 이들이 소속된 가계 중에는 숙종 연간에 이미 도화서 화원을 세전한 가계도 있었다. 숙종 연간에 도화서 화원은 역관 등의 기술직과 같은 부류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중인이 도화서 화원 등 기술직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양반 서자가 진출한 사례도 지극히 소수만 발견될 뿐이고, 사대부가 진출한 사례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대부인 정선이 도화서 화원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기존의 판단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천문학겸교수에 중인이 영조 29년부터 독점적으로 진출하였고, 그 이전에는 사대부도 진출하였음을 실증하였다. 정선이 숙종 연간 말미에 천문학겸교수에 임명되었다는 사실과,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도화서 화원 출신이라고 세상 일부에서 오해하였던 것으로 해석하였다. 정선의 신분이 사대부이어야만 그의 예술적 성과가 위대한 것은 아니다. 도화원 화원 출신이라고 해서 예술적 성과의 위대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정선의 예술가 및 인간으로서의 위대성은 그가 여러 학문에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그림에 투영하였고, 사상적인 사유만 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궁핍한 현실을 극복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 과정에서 賤技에 집착한다는 비난을 받을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열적으로 꾸준하게 노년까지 그림을 그려나간 그의 인생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Abstract

This paper examined two issues : whether Cheong Seon(鄭敾) was from Sadaebu (a man of high birth in Chosun Dynasty, 士大夫) and whether he served as Dohwaseo Hwawons(a court painter in the Royal Court, 圖畵署 畵員) because these two issue have yet to be concluded in the study of Cheong Seon. The status of Cheong Seon was not Jungin(a man between nobility and commoner in Chosun Dynasty, 中人). Members of Cheong Seon's lineage were not engaged in the technical-official posts which were Jungin's occupations and they were not married to members of Jungin family. The status of Cheong seon was not Yangban Seolu(an offspring of a nobleman's concubine, 兩班庶流). Men and women of Cheong Seon's lineage were confirmed to be Yangban Geogson(children born to legal wives of noblemen, 兩班嫡孫) through genealogy records. It turns out to be true that Sungji(Secretary of King, 承旨) Yun Geong-young(尹敬龍) said to Youngjo(英祖) that “Cheong Seon's status is Sadaebu,” The term Sadaebu was used to designate Yangban Geogson. The new historical records cited in this paper confirmed that the status of Cheong Seon was Yangban Geogson, or Sadaebu. It became also clear that Cheong Seon did not serve as Dohwaseo Hwawons(圖畵署 畵員) because it was mostly Jungin's occupation specially during the Sugjong(肅宗)'s reign. Jungin nearly monopolized the technical-official posts(技術職) and Dohwaseo Hwawon was recognized as the technical-official posts such as YeogGuan(譯官) during the Sugjong's reign. Any example that Sadaebu advanced Dohwaseo Hwawon during the Sugjong's reign was not discovered. It was proved that Jungin monopolized Cheonmunhaggyeomgyosu(天文學兼敎授) since Youngjo(英祖) 29Years, but Sadaebu often entered the post before the year. That is why Cheong Seon, as a Sadaebu, got the post in his career, and why he was misunderstand that he served Dohwaseo Hwawon because both jobs were occupations of Jungin and he was a well-known painter at that time. Some people think that Sadaebu Cheong Seon would make more great artistic works than Jungin or Dohwaseo Hwawon Cheong Seon. However, there was no correlation between his status and his artistic achievements. I think that the greatness of Cheong Seon, as a painter and as a human being, was in his life. Most of all, he was a man of learning in many field with wide and deep knowledges which were reflected in his pictures. Secondly, he overcome economic hardship through hardworking and honesty. Thirdly, though he was criticized that he had deep affection on mean works such as paintings, he never stopped painting until he 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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