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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KCI 등재

외교문서 속의 민단‒1975년까지의 외교사료를 중심으로‒

Zainichi Korean in Mindan-affiliated groups on Diplomatic documents-Based on diplomatic documents up to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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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외교부 공개 문서 가운데 DB 작업을 마친 158점을 대상으로, 외교문서에 등장하는 민단의 활동내역을 확인하여 정부가 민단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한 것이다. 외교문서 가운데 민단의 역할에 관해 가장 특징적으로 기술된 것은 총련의 대극점으로서 활동을 할 때였다. 민단의 탄생 경위도 그러하거니와 한국 국내 사정과는 달리 총련과 맞닿아 있는 입장에서, 민단은 총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기민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민단은 자발적으로, 혹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민단과 대척점에 섰다. 일본측 인사도 민단을 조총련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단의 세력의 증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정부는 이 같은 민단의 활약에 대해 민단과 관련된 인사들이 특별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민단강화회의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민단이 줄기차게 요구하던 각종 요구사항들은 무시되거나 애초에 크게 다루어지질 않았다. 이는 정부가 총련의 대극점으로서의 역할을 무엇보다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이 같은 대민단 인식이 결국에는 기민정책이라는 불행한 종말을 맞이하게 하였다.

Abstract

This study aims to confirm how the government recognized Mindan(民団) by checking the activity aspects of Mindan appearing in diplomatic documents, 158 public documents from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n the diplomatic documents, the most characteristic description of the role of Mindan was when it was active as the grand pole of Chongryon(総連). As with the founding process of Mindan, unlike the domestic situation in Korea, it was in conflict with Chongryon, so Mindan had no choice but to react sensitively and promptly to Chongryon. As with the founding process of Mindan, unlike the domestic situation in Korea, it was in conflict with Chongryon, so Mindan had no choice but to react sensitively and promptly to Chongryon. As with the founding process of Mindan, unlike the domestic situation in Korea, it was in conflict with Chongryon, so Mindan had no choice but to react sensitively and promptly to Chongryon. As with the founding process of Mindan, unlike the domestic situation in Korea, it was in conflict with Chongryon, so Mindan had no choice but to react sensitively and promptly to Chongryon. However, as revealed at the “Mindan Reinforcement Meeting”, the various demands that Mindan constantly demanded were ignored or not dealt with much in the first place. This was because the government valued the role of Chongryon as a confrontation point above all else. The government’s perception of the public group eventually led to the unfortunate end of the Rejection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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