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翠雲亭과 白鹿洞 亭子에 대한 재검토
The reexamine of Chui Un pavillion and Bakundong pavi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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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翠雲亭은 박규수를 비롯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유길준 등 개화파가 탄생한 산실이었고, 이곳에서 갑신정변이 구상되었으며, 또한 해외에서 귀국한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저술한 곳으로 한국 근대사의역사적 장소였다. 그런데 취운정은 문일평이 이미 1935년에 저술한 한국의 산수에서 정자의 명칭이 아니라 지명이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취운정이라는 ‘亭’의 명칭으로 인하여 지명이라기보다는 정자로서 더 이해되었고, 서울육백년사, 서울의 누정, 「취운정터 표석」에서는 여전히 취운정을 정자라고만 서술하고 있다. 또한 白鹿洞 亭子는 갑신정변 당시 홍영식의 소유 별장에 있던 정자이며, 근처의 우정국과 함께 정변의 장소로서 거론되었던 정자였으나, 홍영식보다는경기감사 심상훈의 정자로 더 알려졌으며, 더구나 유길준이 이곳에서 서유견문을 저술했다고 하는 오해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원인은 자료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자의적인 해석, 취사선택, 추가, 단순 인용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즉 예를 들면 ‘백록동 정자가 취운정의 일부’라는 자료의 표현은 백록동 정자가 취운정이라는 정자의 일부가 아니라 취운정이라는 지역의 일부인 백록동에 정자가 있다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서울육백년사나 서울의 누정은 취운정을 정자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백록동 정자가 취운정의 일부라고 서술하였고, 그러면서도 또 소유자는민태호와 심상훈으로 다르다고 서술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육백년사는문일평의 한국의 산수를 자의적으로 취사 선택하였고, 서울의 누정은1924년 동아일보에 서술된 민태호를 추가하였다. 또한 서울의 누정은 백록동 정자가 취운정의 일부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유길준이 연금생활을 했고, 서유견문을 집필한 장소가 백록동 정자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백록동 정자의 소유자는 민태호와 상속자 민영익이지심상훈일 수는 없는데, 서울육백년사에서 심상훈의 정자라고 했기 때문에 서울의 누정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이 정자는 심상훈의 정자가 아니라 홍영식의 별장에 있었던 정자이고, 갑신정변 당시 거사 장소로 고려되었던 정자이며,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저술했던 정자는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백록동에 있었던 민태호의 백록동 정자와 홍영식의 백록동 정자가 서술하는 과정에서 섞여버린 것이다.
Abstract
The reexamine of Chui Un pavillion and Bakundong pavillion
참고문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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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동준, "유길준전" (1987),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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